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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1주년' 아이맥이 컴퓨팅을 바꾼 8가지 방법

2019.08.20 Benj Edwards  |  Macworld
애플이 1998년 5월 공개한 아이맥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그러나 아이맥의 진정한 파급력은 1998년 8월 15일 제품이 출하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1세대 아이맥은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데스크톱 컴퓨터로 꼽히지만 현재 기준에서 보면 사양은 고풍스럽다고 할 만하다. 1,299달러에 판매된 아이맥의 주요 사양은 233MHz 파워PC G3 프로세서, 32MB RAM, 4GB 하드 드라이브, 15인치 일체형 모니터와 스테레오 스피커로 구성된다. 그리고 감탄사가 나올만큼 멋진 케이스가 이 모든 부품을 담고 있다.

본디 블루(Bondi Blue) 색상의 아이맥은 애플의 선지자적 리더로서 스티브 잡스의 화려한 귀환을 알리는 동시에 1990년 중반 애플의 추락을 멈춰 세운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초기 마케팅 메시지는 ‘인터넷으로 통하는 사용하기 쉬운 관문’이었지만 아이맥은 그 역할을 초월해 데스크톱 PC 시장과 소비자 산업 디자인의 판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성공을 거두었을까? 1세대 아이맥이 세계를 뒤흔든 8가지 방법을 알아보자.
 

아이맥, 베이지를 죽이다    

아이맥 이전까지 퍼스널 컴퓨터 케이스의 디자인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대부분의 케이스가 금속 재질의 베이지색 또는 회색 박스였으며 디자인의 기준도 미관상 보기 좋은 창작 도구가 아닌 단순한 장비 개념이었다. 아이맥의 디자인은 각진 모서리가 아닌 둥근 곡선, 심심한 회색이 아닌 생생한 컬러를 채택함으로써 이러한 틀을 깼다. 애플은 아이맥의 청록색을 표현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의 본디 비치(Bondi Beach) 해안에서 따온 “본디 블루”라는 새로운 색상 용어까지 만들었다. 순백색 세로줄무늬 패턴과 결합된 본디 블루 아이맥은 그전까지 PC 세계에서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컴퓨터였다.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아이맥은 시작에 불과했다.


“i”의 대공습

아이팟, 아이폰, 아이챗, 아이라이프, 아이사이트, 이런 온갖 ‘아이’의 기원은 어디일까? 애플의 대표적인 브랜딩이 된 소문자 i(아이)의 시작은 바로 아이맥이다.

“아이맥”의 “아이(i)”는 원래 “인터넷”을 의미했다. (스티브 잡스는 1998년 아이맥 슬라이드쇼에서 “individual, instruct, inform, inspire”의 i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름 앞에 “아이”를 붙이는 관행은 애플 제품을 넘어 아이팟 액세서리를 중심으로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별 감흥이 없어지자 애플 아이의 의미도 바뀌었는데, “아이사이트”처럼 별 의미 없는 말장난도 있지만 “아이챗”에서는 1인칭 “나”를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터넷 파도를 타고

아이맥 초기 애플의 마케팅은 1990년대 중반 인기가 높아지던 인터넷에 중점을 뒀다. 애플은 아이맥의 “아이”가 “인터넷”을 의미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아이맥을 글로벌 네트워크에 손쉽게 연결하는 수단으로 홍보했다(겨우 두 단계만 거치면 연결된다고 광고하기도 함). 애플은 인터넷에 초점을 맞춰 아이맥을 다른 컴퓨터와 완전히 차별화해서 소비자 PC 시장의 최상위로 올라선다는 전략을 택했고 이 전략은 적중했다.


USB의 대중화를 이끌다

아이맥은 오로지 USB 인터페이스만 사용했으므로 맥 사용자들은 USB 인터페이스가 없는 구형 마우스와 키보드, 스캐너, 프린터, 외장 드라이브를 다 버려야 했다. 특히 SCSI 포트가 없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SCSI 외장 스토리지를 사용해온 맥 전문가들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맥은 USB가 본 궤도에 오르는 데 필요했던 동력을 제공했다. 아이맥 덕분에 많은 주변기기 제조업체가 각자 최초의 USB 컴퓨터 액세서리를 만들어 판매했다. 당시 나온 대부분의 USB 주변기기가 투명한 청록색 케이스 디자인을 채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플로피 드라이브를 죽이다

애플은 1984년 매킨토시를 통해 소니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내놨다. 그로부터 14년 뒤, 이번에는 아예 플로피 드라이브가 없는 아이맥으로 이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사장시켰다. 이동식 저장 매체인 플로피 디스크의 생략에 대해 미디어는 상당히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플로피 드라이브의 생략은 그 자체로 대담한 성명이었다. 애플은 이제부터는 인터넷과 로컬 네트워크를 사용해서 파일을 전송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좀 앞서간 면은 있지만 애플의 선언은 결국 옳았다. 요즘 컴퓨터에는 플로피 드라이브가 없고, 이를 그리워하는 사용자도 거의 없다.


산업 디자인의 기준 정립

어느 것이든 다음에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 특히 여러 가지 사탕 색상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케이스로 된 상품을 본다면 아이맥 수석 디자이너인 조나단 아이브를 칭송하면 된다(물론 반대로 욕지기가 나올 수도 있음). 아이맥 출시 이후 다양한 색상의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는 소비재 산업 전반에서 너무나 광범위하게 사용된 나머지 1999년~2000년 아이맥 모델 테크니컬러 퍼레이드는 그 자체로 거의 패러디가 됐다. 변화가 필요했던 애플은 2002년 평면 패널 아이맥 출시를 시점으로 알록달록한 색상에서 탈피했다. 다른 회사들은 이번에도 애플의 뒤를 따랐다. 현재 출시되는 대부분의 소비자용 전자제품은 브러시드 알루미늄, 순백색 또는 유광 블랙으로 마감된다. 모두 후속 아이맥에 사용된 색상이다.
 

스티브 잡스의 재기

애플 경영진은 1985년 권력 다툼 중에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를 회사에서 쫓아냈다. 잡스는 1997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한 뒤 복귀했고 얼마 후 “잠정 CEO”가 됐다. 세계는 잡스가 애플을 일으켜 세울 것으로 기대했고 잡스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여러 제품 라인을 폐기하고 전반적으로 비즈니스를 능률화한 뒤 애플은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예산 조정을 통한 어떤 성과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아이맥의 성공에 비할 수는 없었다. ‘잡스의 자식’인 아이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놀라운 제품을 만들도록 이끄는 잡스의 역량을 명확히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맥의 성공은 곧 잡스의 성공이었으며 애플의 충직한 지지자들도 다시 한 번 잡스를 믿고 따르게 됐다.
 

애플을 구한 아이맥

1996년과 1997년, 미디어에서 애플은 이미 사망한 기업 취급을 받았다. 1997년 8억 7,800만 달러 손실을 기록한 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지휘 하에 전열을 가다듬어 1998년에는 4억 1,400만 달러 수익으로 3년만에 첫 흑자를 기록했다. 운영 비용 절감과 아이맥 판매, 두 가지 모두의 결과였다. 그러나 아이맥은 애플의 흑자 전환 이상을 의미했다. 애플이 다시 한 번 혁신적인 제품을 출시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상징적인 영향력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시에 애플이 여전히 건재함을 입증했다.

아이맥 라인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혁신 덕분에 현재 애플은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이러한 호조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아이폰, 아이팟, 아이튠즈가 뉴스를 독식하지만 21세기 애플의 성공은 10년 전 아이맥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ditor@i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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