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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교양

인문학 | 우연에 관한 단상

2015.02.16 이선열   |  CIO KR
우연(偶然)은 필연(必然)의 상대어로 쓰이는 말이다. 필연이 ‘반드시 그러하게끔 되어 있음’을 뜻한다면, 그와 상대되는 의미에서 우연은 ‘꼭 그렇게 되지는 않음’을 뜻할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운동은 필연과 우연의 교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세상사의 어떤 일들이 반드시 그러하게끔 되어 있음을 안다. 그런가 하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연한 사건의 연속 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우연이란 분명 인간의 삶을 이루는 일부이고 나아가 자연계가 돌아가는 섭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인간의 삶에서 우연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연하게 세상에 태어났고 우연으로 점철된 일생을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세상을 떠난다. 내가 1970년 대의 어느 날 한반도 어느 도시에서 태어난 것도 우연이고 어쩌다 보니 철학을 공부하고 지금 이 자리에 칼럼을 쓰게 된 것 역시 우연이다. 나의 죽음 역시 우연의 방식을 따를 것이다. 삶의 종결로서의 죽음은 필연이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을 테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네 인생의 처음과 끝은 모두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어느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우연이라는 단어를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의는 잘못된 것 같다. 세상에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발생하는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조차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어떤 인과의 고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인과 관계를 미리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즉 우연이란 ‘인과 관계가 없음’이 아니라 ‘인과 관계를 모름’을 의미하며 따라서 뜻밖의 일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의 발생을 가리킨다.

우연은 우리의 지력과 의지를 벗어난 것으로서 어떤 의외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처럼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희망과 기대가 존재할 수 있다. 지금은 시궁창 인생이지만 로또 한방이면 인생역전하리라는 희망은, 우연에 의해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에 의지한다. 반면 그러한 예측불가능성은 인간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우연은 다른 말로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처럼 우연은 인간이 품는 희망과 절망의 동일한 근원이다. 만약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예측가능해진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안온하고 동시에 얼마나 권태로울 것인가.

돌이켜 보면 현생인류의 역사는 삶의 불가측성을 극복하려는 우연과의 투쟁사였다. 태곳적 아직 원숭이 티를 벗지 못했던 시절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수렵과 채집활동에 의존했다. 수렵과 채집은 먹거리의 획득을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하는 생존방식이었다. 한 원시인 무리가 어느 하루 배를 채울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날 사냥길에서 무엇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면서 인류는 우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목축과 농경은 인간의 통제 바깥에 있던 먹거리를 계획적으로 생산하는 활동이었고 이로부터 인류는 삶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발걸음을 떼게 된다. 즉 운에 의해 결정되던 먹거리를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게 되자 생존의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을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계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는 자기의 삶이 무작위한 주사위 놀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른바 농업혁명 이후 인간의 역사는 예상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을 제거 또는 극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을 예측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 기술진보의 핵심이념은 거기에 있다. 즉 미지(未知)의 영역을 개척하여 앎의 체계에 복속시키고, 우연의 인과 관계를 밝혀내어 이를 필연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 그렇게 과거에는 속수무책이었던 삶의 우발적 요인들을 점점 통제할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영역 아래 두는 것.

과거엔 어떤 우연한 사건이 필연성을 얻기 위해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섭리’ 같은 신화적 상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과학과 지식의 몫으로 대치된 지 오래다.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은 과거에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더 이상 우연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왔다. 이제 우리는 간단한 혈액 검사로 각종 질환의 발병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어느 날 갑자기 거품 물고 횡사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또 스마트폰 덕분에 내가 탈 버스가 몇 분 후에 도착할지 미리 알 수 있으며 그만큼 간발의 차로 떠나버린 버스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를 일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될 터이고 점점 더 정교해질 것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출산 전 태아의 성별 정도를 식별하는 현수준을 넘어 태어날 아이의 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태아 성별의 선택뿐만 아니라 아이의 지능과 재능을 사전에 디자인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제 인간은 우연의 불가침한 성채였던 생명의 탄생과 죽음까지도 통제범위에 두고자 한다. 정도와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여러 분야에서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우연성이 줄어들수록 우리의 일상은 보다. 합리적이고 계측적이 된다. 물론 그만큼 삶의 신비는 줄어들 것이다. 현대사회의 이 같은 흐름이 딱히 서구 근대 이후 이성주의가 낳은 산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의 우연성과 대치하고 이에 대응하는 노력은 인류라는 군집생명체가 살아가는 본연의 방식이었으니까 다만 근대 이성주의는 신비성과 합리성 사이에서 부유하는 인간 삶의 어떤 균형을 깨뜨리고 어느 한 쪽으로 폭주하게끔 만들었다. 이제 우연은 불합리 부조리의 상징이 되었다. 우연이란 개념을 디지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일종의 ‘시스템 오류’에 해당하리라.

나날이 가속화되는 인간 지식의 발전이 언젠가 그러한 오류를 제로로 만드는 날이 올까> 즉 삶의 우연적 요인이 완전히 말살되는 현실은 가능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우연의 바다를 망망하게 떠돌면서 단지 그 파도에 대응하는 기술만을 향상시켜 왔는지도 모른다. 제논의 거북이를 아킬레스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삶의 우연성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가능성보다 조금 더 먼 곳에 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그 거리를 좁혀 0으로 수렴시키고자 하겠지만 결코 0에 도달하지는 않으리라 그 작지만 영원한 간극 그 사이에 인간 삶의 불변하는 신비가 존재한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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