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2

인문학 | 오늘의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

이선열 | CIO KR
요즘 회사원의 애환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을 즐겨 보고 있다. 회사생활을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약간 생소하기도 하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아 매회 빼놓지 않고 챙겨본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에피소드에선가 흘러나온 대사 한 마디가 강력하게 꽂혔던 적이 있다.

“신념이라니, 골동품 가게에서 낡고 오래된 시계를 본 것 같은 느낌이네요. 요즘은 대학에서도 교수들이 강의할 때 사회정의, 이런 얘기하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하는 시대라서요.”

이 말은 아무리 중요한 바이어를 접대하더라도 양심상 ‘2차 접대’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극중인물 오과장의 ‘신념’에 감탄하면서 안영이가 했던 대사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도 신념 운운하며 사회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투의 얘기다. 스쳐가듯 짧은 장면에 등장한 대사였지만 이 말은 내게 한동안 곱씹어볼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전공특성상 나는 강단에 설 때마다 윤리, 도덕, 정의 같은 단어를 자주 언급하곤 한다. 딱히 도덕적이거나 정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말하고 쓰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이다. 법을 다루는 사람은 항상 법을 생각하고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도자기를 생각하듯이 윤리를 다루는 사람 역시 항상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 자신이 실제 도덕적인 인간인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윤리학자의 소임이자 책무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생>의 대사처럼 도덕이니 사회정의니 하는 단어를 입을 올릴 때마다 나 자신도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듯한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그런 말들이 오늘날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수사가 되어 버렸나.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판에 박힌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어색한 허언(虛言)에 불과하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거나 흥부가 결국엔 복을 받는다는 해피엔딩은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걸 아이들도 안다. 정직, 성실, 자유, 평등, 박애… 도덕과 정의를 말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을 상기해 보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그것들은 얼마나 중요한 가치로 공유되고 있는가?

오늘날 가장 비중 있는 사회적 의제는 도덕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자유도 아니고 평등도 아니다.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반(反)도덕과 부정의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을 따름이다. 지난 시대와 달리 도덕과 정치는 더 이상 사람들의 이상을 대변하지 못한다. 이것은 현시대 현사회에 대한 비판이기 이전에 그저 사실에 대한 진술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더 이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아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나. 오늘의 사람들이 살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 모습인 걸까. 무한경쟁을 유일한 삶의 규칙이자 발전의 동력으로 추앙하는 사회는 결국 ‘승자독식’만을 유일한 윤리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런 룰이 지배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무한한 권력과 자유를 보유하든지 아니면 다른 권력에게 비참하게 노역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의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옴표 안의 문장은 중국작가 쉬즈위안(許知遠)의 글에서 빌려왔다) 다시 말해 승자는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방종한 권력을 누릴 자격을 얻는 반면, 패자는 제아무리 불평등하고 부당한 차별이라도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승자독식의 윤리에서 승자와 패자 사이에 놓인 권리와 빈부의 격차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패자 주제에 감히 승자의 몫을 탐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와 패덕으로 간주된다. 이 같은 에토스가 사회 전반을 지배할 때 사람들이 꿀 수 있는 꿈이란 그저 승자가 되는 것 한 가지 밖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모두가 승자만이 누릴 달콤한 권력을 꿈꾸고 패자에게 가해질 모멸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처럼 승자와 패자가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누구도 게임의 룰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을 때, 승패를 누가 결정하며 그 기준과 과정은 공정한지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은 오로지 승자가 되어 누릴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욕망뿐이다.

그 같은 욕망에 잠식당한 사회에서 정의와 도덕을 이야기한다는 것,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타인의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을 구가하겠다는 이 시대에 도덕과 정의란 정녕 진부하고 낭만적인 구시대의 어휘가 되어 버리고 만 걸까? 설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기세에 눌렸고 잠시 길을 잃었을 따름이리라. 비전을 제시해야 할 지식인들조차 실어증에 빠져 자조와 한탄으로 허우적거리는 지금, 중국의 사회운동가 쉬즈융(許志永)의 간명한 한 마디가 얼어붙은 가슴을 울린다.

“우리의 방식은 비판이 아닙니다. —비판이 아주 중요하더라도— 또 개량도 아니고 대항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방식은 건설입니다.”

물론 세상이 왜 이러냐,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비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력하게 되풀이되는 비판과 항변은 자칫 환멸과 냉소로 습관화되기 쉽다. 비판과 저항 이후에야 비로소 건설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건설 그 자체가 최선의 비판이자 저항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문제다.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는 특정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먼저다.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를 바꿀 수는 있잖은가.


그러니 세상이 잘못되어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내가 살고 싶었던 세상에서 살고 싶은 모습대로 살아가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부정의하고 부도덕한 세상이 불만이라면, 적어도 나는 부정의와 부도덕을 선택하지 않는 것, 그 대신 정의와 도덕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건설’의 범위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세상 전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작더라도 명확한 도덕적 비전과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다. 앞서 말한 드라마 <미생>의 에피소드에서 오과장이 보여준 신념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이처럼 개인적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흡족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다분히 관념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쓸모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무력감과 환멸에 휩싸여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탓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생산적이다. 도덕이 우스워진 시대에 도덕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얼핏 진부해보이지만 가장 급진적인 태도의 표출일 수 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2014.12.12

인문학 | 오늘의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

이선열 | CIO KR
요즘 회사원의 애환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미생>을 즐겨 보고 있다. 회사생활을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약간 생소하기도 하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아 매회 빼놓지 않고 챙겨본다. 그런데 한 번은 어느 에피소드에선가 흘러나온 대사 한 마디가 강력하게 꽂혔던 적이 있다.

“신념이라니, 골동품 가게에서 낡고 오래된 시계를 본 것 같은 느낌이네요. 요즘은 대학에서도 교수들이 강의할 때 사회정의, 이런 얘기하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하는 시대라서요.”

이 말은 아무리 중요한 바이어를 접대하더라도 양심상 ‘2차 접대’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극중인물 오과장의 ‘신념’에 감탄하면서 안영이가 했던 대사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아직도 신념 운운하며 사회정의를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투의 얘기다. 스쳐가듯 짧은 장면에 등장한 대사였지만 이 말은 내게 한동안 곱씹어볼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전공특성상 나는 강단에 설 때마다 윤리, 도덕, 정의 같은 단어를 자주 언급하곤 한다. 딱히 도덕적이거나 정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말하고 쓰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이다. 법을 다루는 사람은 항상 법을 생각하고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도자기를 생각하듯이 윤리를 다루는 사람 역시 항상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 자신이 실제 도덕적인 인간인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적어도 무엇이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윤리학자의 소임이자 책무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생>의 대사처럼 도덕이니 사회정의니 하는 단어를 입을 올릴 때마다 나 자신도 정말 손발이 오그라드는 듯한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그런 말들이 오늘날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수사가 되어 버렸나.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판에 박힌 말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어색한 허언(虛言)에 불과하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거나 흥부가 결국엔 복을 받는다는 해피엔딩은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걸 아이들도 안다. 정직, 성실, 자유, 평등, 박애… 도덕과 정의를 말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을 상기해 보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그것들은 얼마나 중요한 가치로 공유되고 있는가?

오늘날 가장 비중 있는 사회적 의제는 도덕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자유도 아니고 평등도 아니다.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반(反)도덕과 부정의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을 따름이다. 지난 시대와 달리 도덕과 정치는 더 이상 사람들의 이상을 대변하지 못한다. 이것은 현시대 현사회에 대한 비판이기 이전에 그저 사실에 대한 진술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더 이상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아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나. 오늘의 사람들이 살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 모습인 걸까. 무한경쟁을 유일한 삶의 규칙이자 발전의 동력으로 추앙하는 사회는 결국 ‘승자독식’만을 유일한 윤리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런 룰이 지배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무한한 권력과 자유를 보유하든지 아니면 다른 권력에게 비참하게 노역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의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옴표 안의 문장은 중국작가 쉬즈위안(許知遠)의 글에서 빌려왔다) 다시 말해 승자는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방종한 권력을 누릴 자격을 얻는 반면, 패자는 제아무리 불평등하고 부당한 차별이라도 묵묵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승자독식의 윤리에서 승자와 패자 사이에 놓인 권리와 빈부의 격차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패자 주제에 감히 승자의 몫을 탐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의와 패덕으로 간주된다. 이 같은 에토스가 사회 전반을 지배할 때 사람들이 꿀 수 있는 꿈이란 그저 승자가 되는 것 한 가지 밖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모두가 승자만이 누릴 달콤한 권력을 꿈꾸고 패자에게 가해질 모멸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처럼 승자와 패자가 같은 의식을 공유하고 누구도 게임의 룰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을 때, 승패를 누가 결정하며 그 기준과 과정은 공정한지에 대한 물음은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은 오로지 승자가 되어 누릴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욕망뿐이다.

그 같은 욕망에 잠식당한 사회에서 정의와 도덕을 이야기한다는 것,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타인의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을 구가하겠다는 이 시대에 도덕과 정의란 정녕 진부하고 낭만적인 구시대의 어휘가 되어 버리고 만 걸까? 설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기세에 눌렸고 잠시 길을 잃었을 따름이리라. 비전을 제시해야 할 지식인들조차 실어증에 빠져 자조와 한탄으로 허우적거리는 지금, 중국의 사회운동가 쉬즈융(許志永)의 간명한 한 마디가 얼어붙은 가슴을 울린다.

“우리의 방식은 비판이 아닙니다. —비판이 아주 중요하더라도— 또 개량도 아니고 대항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방식은 건설입니다.”

물론 세상이 왜 이러냐,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비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력하게 되풀이되는 비판과 항변은 자칫 환멸과 냉소로 습관화되기 쉽다. 비판과 저항 이후에야 비로소 건설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건설 그 자체가 최선의 비판이자 저항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문제다. 우리가 맞서야 할 상대는 특정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먼저다.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를 바꿀 수는 있잖은가.


그러니 세상이 잘못되어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내가 살고 싶었던 세상에서 살고 싶은 모습대로 살아가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부정의하고 부도덕한 세상이 불만이라면, 적어도 나는 부정의와 부도덕을 선택하지 않는 것, 그 대신 정의와 도덕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건설’의 범위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세상 전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니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작더라도 명확한 도덕적 비전과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다. 앞서 말한 드라마 <미생>의 에피소드에서 오과장이 보여준 신념이 이에 해당한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이처럼 개인적 차원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흡족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다분히 관념적인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쓸모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무력감과 환멸에 휩싸여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을 탓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생산적이다. 도덕이 우스워진 시대에 도덕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얼핏 진부해보이지만 가장 급진적인 태도의 표출일 수 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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