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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교양

인문학 | 앎과 행동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2013.05.15 김민철   |  CIO KR
고대 그리스에서 살았던 소크라테스와 그보다 1,500년 이상의 시간과 동서의 지리적 간극을 두고 명나라에서 살았던 왕양명이라는 두 사상가의 공통점은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상사를 공부하다 보면 예외 없이 마주치게 되는 이 말의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약 그들이 의도한 바가 “앎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라고 하는 당위적인 주장이었다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으며, 그 주장에 반대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착하게 살자”와 같은 하나마나 한 좋은 말씀 한 번 하신 셈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에 대해 더 생각하고 논의해 볼 여지란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정확한 표현은 ‘지행당일치(知行當一致)’ 혹은 ‘지행수일치(知行須一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위를 의미하는 조동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의도적이든 실수이든 간에 조동사가 포함되지 않은 그 문장은 당위가 아니라 “앎과 행동은 일치한다”라는 사실을 진술하는 것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그들의 의도가 이것이었다면,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식과 전혀 동떨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때 그 말은 진정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이 지점에서 먼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철학의 부재다. 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구나 한 번쯤은 접해 보았을 이 말이 이렇게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 별로 논의의 가치가 없다는 사실이나 후자의 경우 많은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해보거나 혹은 한 번이라고 생각해 본 사람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상식과 전혀 동떨어진 주장을 듣고서도, 그것이 단지 유명한 사상가들의 발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심을 품거나 따져 묻지 않고 그저 암기하고 지나갔을 뿐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상 교육의 현주소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 문제가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전자의 경우는 교장 선생님 혹은 주례 선생님의 훈화처럼 좀체 귀에 들어오지 않는 훈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견의 소지나 논의의 가치가 거의 없다. 이 말이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상식과 동떨어진 이 주장이야말로 앎의 진정한 가치와 역할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처럼 앎과 행동은 일치한다는 사실적 언명이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반드시 행동하기 마련이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지지하는 그 주장은 전칭명제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장이 “어떤 일부의 앎은 행동과 일치한다”라는 의미라면 그에 반대할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며, 그것을 당위적으로 해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논의의 여지나 가치가 거의 없기 마련이다. 그것이 정당하게 논변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앎은 행동과 일치한다”라고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전칭긍정인 것이다. 그리고 전칭긍정에 대한 반박은 매우 간단하다. 특징부정명제를 거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여성들은 남성보다 힘이 약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을 위해서는 남성보다 힘이 강한 여성이 한 명만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이제 나를 포함한 지행일치론자들은 “모든 앎은 반드시 행동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알면 반드시 행동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례를 하나만 성공적으로 거론하면 될 것이다. 일견 이는 너무나 쉬워 보인다.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피우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바람을 피며,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밤에 치킨과 맥주를 먹곤 한다. 이러한 사례는 무궁무진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행일치론자들의 주장은 너무나 무모한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 거론한 것을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단순한 한 가지 앎이 아니다.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이상의 앎이 있으며, 그 갈등 상황에서 한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지만, 담배를 한 대 피웠을 때의 그 행복감 또한 안다. 후자가 더 강한 앎이기 때문에 전자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그 혹은 그녀와의 데이트나 애정 행각이 얼마나 짜릿하고 감미로운지에 대한 앎은 보다 강력하다. 살을 빼야 한다는 마음도 절실하지만, 바삭하고 고소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의 맛이란 얼마나 감동적일지는 더 잘 안다.

그러한 결정이 두 가지 앎의 대결이라는 사실은 한 쪽 앎을 강화시켜주었을 때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더 잘 드러난다. 유명 야구 해설가인 하일성씨는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 담배를 끊었다. 흡연의 쾌락에 대한 앎에 굴복 당했던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앎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극적으로 강화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대다수의 국가에서 담뱃갑에 끔찍한 사진을 의무적으로 싣는 것은 그러한 앎을 다소나마 강화시켜주기 위한 조치다. 바람을 피우는 사람에게는 배우자가 어렴풋이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고 증거를 잡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리고 치킨과 맥주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지속될 경우 1년 후에 그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으로 반대쪽 앎이 강화될 수 있다.

군대에서 아무 필요도 없어 보이는 정훈교육을 하는 이유나,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계속 하는 이유도 사실은 잠재의식 속에 특정 규범에 대한 앎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사실은 인격을 수양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강제로 실시되는 봉사활동을 통해 봉사의 필요성에 대한 앎이 강화되면 그것이 자발적 봉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설이나 역사서를 통해 특정 사건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자신은 절대로 저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앎이 확고해지기도 한다. 삶에 대한 가치관을 확고히 한다는 것은 직간접적 경험을 충분히 함으로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내용에 대한 앎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혹은 부정의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 깊이 공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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