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5

인문학 | 진정한 자유 ; 얽매이지 않음

김민철 | CIO KR

10년쯤 전, 십팔기라는 무예의 전수자이자 체육과 박사과정생이었던 친구와 품앗이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게 한문을 배우고, 필자는 그 친구에게 무술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와 동문수학한 승려가 찾아와 같이 운동을 했다. 그 친구와 승려는 함께 식사할 것을 청했고, 필자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필자는 곧 그 상황이 다소 곤혹스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보다 이전 공부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비구니와의 기억 때문이었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어디에 가야 할 지부터가 고민이었다. 일행들은 무엇을 먹여야 할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식당을 골라 들어가면, 그는 식당에 가면 “비빔밥에 계란하고 고기 빼고 주세요”, “된장찌개에 바지락이나 조개는 넣지 말아 주세요”와 같은 요구를 하곤 했다. 그도 힘들었겠지만, 나머지 일행들도 편치 않기는 매일반이었다.

생각 없이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해 놓고 잠시 동안 혼자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 승려가 “우리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지요”라고 활기차게 말했다. 다소 놀라웠지만, 일단 내 고민은 쉽사리 해결된 셈이었다. 그런데 삼겹살집에 가서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까까머리에 승복을 입은 사람이 포함된 일행이 삼겹살집에 들어갔으니, 그곳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당황하던 나와는 달리, 그 승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아서는 “아주머니, 여기 삼겹살 3인분하고 소주 두 병 주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당황하였지만, 그의 당당한 태도에 사람들은 이내 우리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필자는 그런 태도야말로 정말로 불교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해탈(解脫)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풀어내고 벗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집착에서 생긴다고 한다. 욕망에 대한 집착,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집착을 벗어버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곧 극락이다. 깨달은 자란 자유를 얻은 자인 것이다.

해탈, 즉 완전한 자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무언가에 집착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조사(선불교의 큰 스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경전을 불태운 고승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승이나 경전, 나아가 부처에 대한 집착에서까지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고승들의 기행은 그냥 미친 짓으로 보일 뿐이다. 선불교의 조사는 오직 이전의 조사만이 정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자만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승 하나가 제자들의 깨달음을 시험하던 중, 한 제자가 갑자기 스승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하였다. 그야말로 스승의 가르침뿐 아니라 스승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2012.03.15

인문학 | 진정한 자유 ; 얽매이지 않음

김민철 | CIO KR

10년쯤 전, 십팔기라는 무예의 전수자이자 체육과 박사과정생이었던 친구와 품앗이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게 한문을 배우고, 필자는 그 친구에게 무술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와 동문수학한 승려가 찾아와 같이 운동을 했다. 그 친구와 승려는 함께 식사할 것을 청했고, 필자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필자는 곧 그 상황이 다소 곤혹스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보다 이전 공부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비구니와의 기억 때문이었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어디에 가야 할 지부터가 고민이었다. 일행들은 무엇을 먹여야 할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식당을 골라 들어가면, 그는 식당에 가면 “비빔밥에 계란하고 고기 빼고 주세요”, “된장찌개에 바지락이나 조개는 넣지 말아 주세요”와 같은 요구를 하곤 했다. 그도 힘들었겠지만, 나머지 일행들도 편치 않기는 매일반이었다.

생각 없이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해 놓고 잠시 동안 혼자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 승려가 “우리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지요”라고 활기차게 말했다. 다소 놀라웠지만, 일단 내 고민은 쉽사리 해결된 셈이었다. 그런데 삼겹살집에 가서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까까머리에 승복을 입은 사람이 포함된 일행이 삼겹살집에 들어갔으니, 그곳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당황하던 나와는 달리, 그 승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아서는 “아주머니, 여기 삼겹살 3인분하고 소주 두 병 주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당황하였지만, 그의 당당한 태도에 사람들은 이내 우리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필자는 그런 태도야말로 정말로 불교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해탈(解脫)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풀어내고 벗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집착에서 생긴다고 한다. 욕망에 대한 집착,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집착을 벗어버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곧 극락이다. 깨달은 자란 자유를 얻은 자인 것이다.

해탈, 즉 완전한 자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무언가에 집착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조사(선불교의 큰 스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경전을 불태운 고승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승이나 경전, 나아가 부처에 대한 집착에서까지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고승들의 기행은 그냥 미친 짓으로 보일 뿐이다. 선불교의 조사는 오직 이전의 조사만이 정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자만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승 하나가 제자들의 깨달음을 시험하던 중, 한 제자가 갑자기 스승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하였다. 그야말로 스승의 가르침뿐 아니라 스승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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