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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 유심(USIM) 없앤 애플의 만용은 독점에서 나온다

2022.09.22 문준현  |  CIO KR
애플은 익숙한 기능을 가차 없이 버리는 회사로 악명높지만, 만약 언젠가 바꿔야 하는 것이라면 먼저 나설 수 있는 기업은 얄밉게도 애플뿐이다. 
 
ⓒiFixit

애플은 이번 아이폰 14 시리즈에서 큰 결심을 했다. 다이내믹 아일랜드나 아이폰 14 프로의 가격을 올리지 않은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미국에 발매되는 모든 아이폰 14 모델에 물리적 유심카드를 아예 지원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용기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얄밉다. 심지어 함부로 만용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이 소식을 몰랐다면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아이폰 14 모델에서 유심카드를 쓸 수 없다. 애플이 미래라고 주장하는 e심(embedded SIM)이 대체재다. 2021년 말에 이미 아이폰 15 시리즈부터 전 아이폰 모델에서 유심카드 슬롯이 사라질 것이라는 루머가 나왔다. 정확히 언제가 됐든 유심핀을 찾기 위해 방을 뒤져야 하는 시대는 곧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 

모든 신기술이 그렇듯 e심의 시대로 가는 길에는 뽑아야 할 잡초가 무성하다. 특히 통신사의 역할이 관건이다. 사용자가 e심을 개통하거나 e심만 지원하는 스마트폰으로 전환하는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건 각 통신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만약 e심이 전 세계 통신사에 걸쳐 매끄럽게 지원된다면 장점은 여럿이다. e심은 기기 자체에 내장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번호를 개통할 때 물리적 유심카드를 주문하거나 매장에 방문해 구매할 필요가 없다. 통신사가 제공하는 e심용 프로파일 소프트웨어를 다운 받으면 그만이다. e심은 특히 한 기기에서 여러 번호를 쓰거나 해외에 나갔을 때 네트워크를 전환하기 매우 쉽다. 

물론 쉽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각 통신사의 사용자 경험에 따라 편의성이 달라진다. 애플은 사용자 경험을 통제하기 좋아하는 기업이다. 그런데 왜 굳이 유심카드를 없애려고 할까? 
 

압도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애플은 아이폰 14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e심이 얼마나 더 편리한지 설명했지만, 이는 장담할 수 없다. 애플의 진짜 의도가 어떻든, 사실 애플의 입장에서 e심의 가장 큰 이점은 내부 공간 확보다. 

물론 유심카드의 크기가 이미 코딱지만 한데 굳이 없앨 필요가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하지만 크기란 항상 상대적이다. ‘나노’ 심카드는 A15 칩 회로 영역만큼의 공간을 차지한다. 반면 기능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심카드는 통신사 인증 정보를 확인하는 단일 목적을 수행하지만 A15 칩은 아이폰의 뇌다. 

e심은 회로에 내장되어 사실상 추가로 차지하는 공간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하다. 매년 새로운 아이폰을 사야할 이유를 짜내야 하는 애플의 엔지니어링 팀에게 이런 티끌만 한 공간도 가뭄에 단비일 것이다. 

아쉽게도 미국용 아이폰 14 모델에서 여분의 유심카드 공간은 의미 있게 활용되지 않는다. 분해 결과 단지 플라스틱으로 덮여있다. 애플은 다행히도 미국 외에 다른 국가에서 판매되는 아이폰 14 모델에는 유심카드 슬롯을 살려두기로 했지만, 이 결정으로 인해 남은 공간을 활용하려면 내부를 완전히 새롭게 설계해 미국용 아이폰 14 제품군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규모의 경제가 너무 약해진다. 
 

시장 독점으로 내부 공간 독점 

아무리 미국 발매 모델에만 적용한다지만 소비자가 수십 년 동안 써온 것을 한 번에 버리는 결정은 위험 부담이 크다. 또한 통신사들이 아무리 e심 사용자 경험을 잘 만든다고 해도 어떤 것들은 그냥 아날로그 방식으로 남는 게 가장 단순하고 편하다. 자동차의 물리 조작 버튼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애플뿐만 아니라 모든 스마트폰 제조사가 유심카드를 없애고 e심을 지원하고 싶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이미 지루해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새로운 모델을 팔려면 새로운 기능, 즉 공간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모두가 항상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부 공간을 확보하는 데 목을 맨다. 

이 귀중한 내부 공간을 확보하고자 오직 애플만이 유심카드를 없애버리는 짓을 제일 먼저 할 수 있다. 애플은 상대적으로 독점 기업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 독점 기업이란 건 없다. 2022년 2분기 삼성과 애플의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각각 21%, 16%로 나타났다

하지만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에는 독점 기업이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는 공식 판매 가격이 600달러가 넘는 스마트폰을 프리미엄으로 분류한다. 이 시장에서 애플의 점유율은 2022년 2분기 기준 57%에 달했다. 게다가 아이폰은 독자적인 iOS 운영체제와 앱스토어를 쓰므로 애플의 생태계에 발을 조금이라도 깊게 들여놨다면(앱스토어 앱 구매, 애플 서비스 사용 등등) 빠져나가기 힘들다. 

안드로이드 진영은 얘기가 다르다. 아무리 제조사마다 나름대로 각자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만들었다고 하나 결국 같은 안드로이드OS를 쓰며, 한 제조사가 유심카드를 제거한 것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다른 경쟁사의 제품을 사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애플이 해야 다른 회사도 한다 

얄밉지만 항상 애플이 새로운 기술 도입에 총대를 멜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로운 기술이 아무리 월등하더라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고, 익숙함이라는 벽을 허물기 힘들다. 애플은 독점적인 지위를 무기 삼아 이런 장벽을 무너뜨려 왔다. 헤드폰 잭도 그랬고, 유심카드 슬롯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e심 전용 아이폰 14 모델은 e심 시대로 가는 전초전이자 전 세계 통신사에게 보내는 신호다. 애플은 미국 기업이므로 먼저 미국 통신사와 협력해 국내에서부터 e심 지원을 확고히 하려 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용 아이폰 14를 구매한 미국 소비자 중 일부는 해외로 나갈 일이 있을 테고, 다른 국가의 통신사는 이를 대비해 e심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e심 전용 아이폰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전 세계 모든 통신사가 e심 지원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애플의 의도가 어떻든 e심 지원이 널리 퍼지면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애플이 매번 얄밉게 느껴지는 이유는 총대를 매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리라. ciokr@idg.co.kr, ethan_moon@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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