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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3 정철환  |  CIO KR
얼마 전 필자의 작은 방에서 어떤 물건을 찾으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어딘가에 둔 기억은 나는데 보이지가 않아 방의 책장 위에 쌓아둔 정체 모를 박스들을 모두 하나씩 열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연애시절 지금의 집사람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모아 놓은 상자를 새삼스럽게 다시 열었다. 그리곤 편지 하나를 꺼내 읽어보며 이미 오래된 기억을 머릿속에서 추억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문자나 숫자 정보의 디지털화로부터 시작한 디지털 시대는 음악, 사진, 편지를 넘어 이젠 사람과 사람의 관계까지도 디지털화 하는 세상으로 발전하였다. 덕분에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글과 사진을 개인이 만들어내는 시대이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카카오스토리에서 매일 엄청난 양의 사진과 글들이 창조되고 인터넷을 통해 흘러 다닌다. 분명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정보들을 만들지만 정작 자신의 주의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다.

음악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니 몇 년간 새로 산 CD나 음반은 한 장도 없다. 사진은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하니 벽에 걸어 놓은 액자의 사진은 아주 오래 전 찍은 사진 그대로다. 책상에는 최근 누구와 주고받은 편지 한 장 없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새로 산 책도 한 권 없다. 모두 전자책 단말기 안에 있을 뿐이다. 역사상 가장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면서 정작 주변을 돌아보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최근 몇 년간 새로 생겨난 것이 별로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가 사용하던 일체형PC가 갑자기 사용 중에 멈추더니 아예 부팅이 안 되는 상황에 놓였다. 평소 백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스마트폰의 백업은 열심히 받아 놓았는데 그 백업 데이터가 모두 PC안에 있었다. 최근 4~5년간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이 전부 거기에 담겨 있었다. 다행히 수리 후 정상 동작을 하게 되었고 데이터도 손상이 없었지만 문득 '사진 데이터가 손상되었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과 함께 디지털 사진의 허망함(?)이 새삼 피부에 와 닿았다.

인류 문명은 문자를 발명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대 문명이 점토판에 문자를 새긴 기록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면서 당시 문명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우리에게 문자 기록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모든 것인 디지털화 되어 정보시스템 내에서만 존재하는 날이 온다면? 어쩌면 그런 상황은 인류가 가진 문명이 물리적인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고 무형의 상태로만 유지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류 문명의 유산, 역사의 유물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 유명 소설책의 초판도 없을 것이고 역사에 남을 음악 연주자의 초판 앨범도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게 해 줄 음반이나 책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지난날을 추억하게 될까?


최근에는 어떤 업체에서 페이스북에서 활동한 내역을 진짜 책으로 출판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라도 오프라인으로 뭔가를 남겨두는 것이 먼 훗날 꽤 큰 가치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집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학창시절에 적었던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의 최근 10여 년간의 사진, 음악, 글, 그리고 생각들이 집에 있는 외장 하드에 들어있다. 물론 이중으로 백업을 해 놓기는 했지만 왠지 불안한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그래서 우라 아이의 어렸을 적 모습을 담은 영상은 이미 디지털 파일로 변환을 해 놓았지만 여전히 VHS 비디오 테이프를 보관하고 있다.

아울러 요즘 해킹이 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모든 지적, 정신적인 활동의 결과물은 물론 개인의 세세한 일거수일투족을 스마트폰을 통해 누군가가 항상 감시할 수 있다는 설마 했던 걱정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제 누구도 디지털을 통한 감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편리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스마트폰이 그 편리함을 좋은 쪽으로만 활용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디지털 포비아(Digital Phobia)라는 새로운 두려움을 만들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온라인으로 철저하게 분석, 감시되는 사회가 오게 되는 것은 분명 불행한 사건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생산, 전파, 소비되는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를 맞이한지도 이미 10여 년이 넘었다. 사진과 음악은 디지털로 완전히 넘어 왔으며 책도 점차 디지털화 되어가고 있다. 인간관계 역시 페이스북 등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디지털화 되었다. 필자 역시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모든 면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누리고 있지만 먼 훗날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하고 추억에 잠길 수 있을지, 친한 친구와 주고 받았던 글을 여전히 읽어볼 수 있을지, 삶의 어느 순간 마음을 위로해주던 손때 묻은 음반을 꺼내 들고 오디오에 걸어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최소한 필자는 그러한 아날로그 시대를 지내왔기에 그런 추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요즘 세대는 먼 훗날 어떻게 추억에 잠길게 될지 궁금하다. 분명 필자가 상상하지 못하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개인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철환 팀장은 삼성SDS,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쳐 현재 동부제철 IT기획팀장이다. 저서로는 ‘SI 프로젝트 전문가로 가는 길’이 있으며 삼성SDS 사보에 1년 동안 원고를 쓴 경력이 있다. 한국IDG가 주관하는 CIO 어워드 2012에서 올해의 CIO로 선정됐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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