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위치한 어느 한 조선소. 최근 이곳에선 현장 엔지니어와 용접공 사이로 AI 개발자가 분주히 다니고 있다. ‘배 만드는 데 무슨 AI 개발자가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HD한국조선해양 조선소에서는 일상화된 풍경이다. 조선소뿐만이 아니다. 정유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도 곧 AI 전문가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에너지, 건설 기계 사업을 운영하는 HD현대 그룹사의 이야기다.
HD현대는 2년 전부터 AI에 전략적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아예 최고 AI 책임자, 줄여서 CAIO(Chief AI Officer)라는 임원을 선임하기도 했다. 노동집약적이고 아날로그 요소가 많은 중화학공업에서 AI로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존재할까? CAIO로 임명된 김영옥 HD현대 상무는 이미 AI 기반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철, 석유, 기계의 세계에 어떻게 AI가 스며들고 있는지, HD현대의 행보를 함께 살펴보자.
CAIO, 중화학공업의 혁신 엔진 ‘응용 AI’을 주도하다
HD현대는 조선, 에너지, 산업기계 등 중화학공업 관련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지주회사다. 계열사 수는 29개이며 대표적으로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사이트솔루션이 있다. 2023년 기준 매출은 61조원, 계열 전체의 임직원 수는 약 3만 7,000명이다.
김영옥 상무는 2022년 9월 CAIO로 선임된 후 AI 전략팀 및 AI 센터(이하 AIC)를 이끌고 있다. 해당 조직은 약 80명 규모로 대부분 엔지니어, 개발자, 데이터 과학자로 구성됐다.
아직 국내에 생소한 CAIO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김영옥 CAIO 표현에 따르면, CAIO는 AI 기술 도입에 필요한 정책을 수립하고, 인재를 영입하고, 전사 AI 역량을 높이는 일을 담당하는 임원이다. 기존 IT 리더인 CIO(Chief Information Officer)와 CDO(Chief Data Officer)와 달리 ‘AI 기반 비즈니스 성과’ 창출에 보다 집중한다. 반면 CIO가 ERP, MES, CRM 등 전통적 인프라의 자동화와 프로세스 개선 작업에 주력하고, CDO는 판매 지표 개선, 영업 데이터 정의, 고객 추이 분석 등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을 돕는 과제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비 IT 중심 기업의 CAIO는 특히 AI 도입을 통한 실질적 비즈니스 혁신에 주력한다. 전문 용어로 ‘어플라이드 AI(Applied AI, 응용 AI)’라고 부른다. 어플라이드 AI는 AI로 특정 문제를 해결하거나 실제 비즈니스 및 산업의 다양한 도메인에 적용하는 방법론이자 관련 기술을 말한다. 김영옥 CAIO는 “CAIO의 주요 업무는 어플라이드 AI 역량을 키우며 비즈니스와 밀접하게 연관된 과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것”이라며 “특히 B2B 사업에서 어플라이드 AI가 빛을 발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조직 구성 및 인재 영입을 마친 김영옥 CAIO는 최근 어플라이드 AI 관련 과제 발굴 및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AI 기업과의 파트너십도 추진하며 필요한 기술 환경을 만들기도 했다.
한 가지 주목할 만 점은 HD현대가 AI 조직을 각 계열사에 나눠서 두지 않고 그룹사에 통합 배치하는 전략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인재 확보를 위한 의도적인 결정이었다고 한다.
김영옥 CAIO는 “AI 개발은 일정 규모 이상의 팀에서 수행될 때 효율성과 규모의 경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분야”라며 “HD현대는 계열사별 필요 인력을 통합해 그룹 차원의 AI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팀 규모를 키우고, 개발한 AI 기술을 ‘공용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컴퓨터 비전을 만든 후 비슷한 기능을 중복 개발 없이 각 계열사의 상황에 맞게 맞춤 적용하는 식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김영옥 CAIO는 “지금처럼 AI 인력 수요가 높은 상황에서 각 계열사마다 AI 부서를 둔다면 같은 인재를 두고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라며 “그룹 차원에서 AI 인재를 통합 채용하여 전 계열사에 적용 가능한 AI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HD현대가 만든 AI 사례 2가지
CAIO 취임 2년 만에 김영옥 CAIO는 중공업 분야에 특화된 AI 사례를 발굴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다용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오션와이즈(OceanWise)’라는 솔루션이다.
일반 차량 도로와 달리 바다에는 신호등과 차선이나 포장도로가 없다. 연료 효율과 속도를 고려한 최적 경로를 선정하려면 선장의 노하우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최적 경로는 출발 및 도착 일정, 날씨, 항로, 선박 종류, 화물량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HD현대는 다양한 요소를 AI로 분석해 최적의 경로를 추천해주는 오션와이즈를 개발했다. 이 기술을 다양한 선주에게 판매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고 있다.
오션와이즈의 최적 경로 계산은 탄소 배출량 감소에도 기여한다. 외부 빅데이터와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선박의 위치정보만으로 탄소 배출량을 측정 및 예측하는 이 기술은 연료 소비를 최소화하는 최적 경로를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좀 더 경제적이고 친환경적인 운항을 지원한다. 김영옥 CAIO는 “탄소 배출량 감소가 조선 업계에서 중요한 화두라는 점에서, 이런 기술적 해결책은 큰 가치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사례는 조선소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생성형 AI 기반 번역 서비스 ‘AI 에이전트’다. 조선 산업은 외국인 작업자의 비율이 높은 업종이다. 2023년 기준 조선업체에 신규 취업한 생산인력의 86%는 외국인이라는 통계도 존재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새로 합류한 직원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 대화에서는 조선업 전문 용어, 일본식 건설 용어, 사투리가 혼용되어,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인 직원조차 원활한 소통이 힘들었던 것이다.
기존 번역기를 이용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전장(배 안의 전기 관련 업무)’, ‘족장(조선소 작업에서 쓰는 발판)’, ‘오사마리(일본어로 ‘일을 마무리하다’라는 뜻으로 건설 현장 용어)와 같은 단어는 일반 번역기가 제대로 번역하지 못했다. 영어라면 한국인 직원이 번역기의 오류를 파악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어, 네팔어, 스리랑카어 등으로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에서 번역 품질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웠다.
HD현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업 맞춤형 번역 서비스를 개발했다. 이를 위해 현장 및 국가 표준 조선 용어 1만 3,000개와 선박 건조 과정의 4,200개 작업 지시 문장을 수집하고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 학습시켰다. 이 번역기 하나로 조선소 현장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지고 생산성도 높아졌다. HD현대 AIC(AI Center)는 향후 음성 인식 기능을 추가해 서비스를 고도화할 계획이다.
김영옥 CAIO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AI 기술 적용 범위를 조선업 외에도 에너지, 건설 기계 등 다른 산업에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멀티모달 AI 기술의 발전으로 계열사에 축적된 도면 이미지 등 비정형 데이터 활용 기회가 증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적용 사례가 나올 것으로 전망했다.
AI 프로젝트 성과 비법은 ‘현장 방문’과 ‘경영진 지지’
사실 AI를 통해 혁신을 만들고 싶은 기업은 많다. 그러나 데이터 유출 같은 보안 우려 그리고 부정확한 정보를 출력하는 ‘환각’ 현상 같은 문제로 AI 도입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 업계에서 AI의 활용은 회의 내용 요약, 녹취록 작성, 코드 리뷰 등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
김영옥 CAIO는 응용 AI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면 일단 빠르게 시작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AI 영역에선 사실상 6개월 주기로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가 나오고 있다. 이런 기술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완벽한 해결책을 하염없이 기다린다면 AI 프로젝트 관련 성과를 내기 어렵다”라며 “이제 보안이나 환각 문제도 사람의 검토를 강제하는 등과 같이 제도 및 프로세스를 적절히 구축하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김영옥 CAIO는 AI를 절대적 정답을 제시하는 도구가 아닌, ‘최적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기술로 보고 있다. 이러한 철학 하에 그는 기술적 세부 사항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는다. 기술적 결정은 보통 실무진의 판단에 맡기는 편이다.
오히려 김영옥 CAIO가 AI 과제를 선정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현장의 목소리’다. 이를 직접 듣고자 매주 1~2회 울산, 목포, 보령 등 계열사 공장을 돌아가며 방문하고 있다. 직원과의 대화를 통해 업무 현장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김영옥 CAIO는 “현장과 소통을 적극 하면서 HD현대 계열사에 실질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AI 사례를 발굴하고 있다. 이렇게 개발된 AI 기술은 현장 직원들의 높은 관심을 받는데도 도움이 된다”라며 “AI 개발은 자칫 연구용으로만 남을 수 있는데, 현장 방문을 하다 보면 보다 실용적인 기술을 만들고, AI 결과물에 대한 사용자와 개발자 간의 기대치를 조율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김영옥 CAIO는 AI 프로젝트의 성과를 내는 데 경영진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CIO코리아가 2023년 국내 IT 리더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경영진 지원’이 AI 과제 수행을 위한 핵심 요소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최고 경영진의 지원과 함께 조직 구조 및 인력 재정비가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다.
애초에 CAIO라는 직급을 구상하고 선임하는 것도 HD현대 경영진의 의지로 이뤄졌다. 김영옥 CAIO는 “HD현대 계열사는 대부분 오랜 기간 업계를 선도해 온 기업이다. 경쟁사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기 위해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AI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챗GPT 열풍 이전부터 경영진 내부에서 나온 상황이었다”라며 “HD현대의 도전을 장려하는 기업 문화 자체도 AI 조직에 추진력을 제공했다”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김영옥 CAIO는 HD현대 AIC를 업계 AI 혁신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AI 인재 중심지로 만드는 데 힘쓸 예정이다.
김영옥 CAIO는 “조선, 에너지, 건설 같은 중화학공업에서의 AI 활용이 개발자들에게 아직 생소할 수 있지만, 이 분야는 풍부한 데이터와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시장으로 오히려 많은 기회가 열려 있는 곳”이라며 “LLM 개발 못지않게 응용 AI 분야가 업계 다양한 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훌륭한 미래 CAIO가 HD현대에서 나올 수 있을 만큼 AI 개발자가 원하는 조직을 만들고 싶다”라고 밝혔다.
jihyun.lee@foundryc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