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6

인문학 | 설득의 기술은 공감에 있다

이선열 | CIO KR
지금은 종영했지만 약 10여 년 전 TV에서 방영한 프로그램 중에 <100인 토론>이라는 것이 있었다. 매회 특정 사회적 이슈를 정하여 초청패널이 찬반 논쟁을 벌이는 전형적인 시사토론 방송이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개성은 패널 외에 100인의 일반인 방청객이 참여해 토론 전후에 찬반 투표를 한다는 데 있었다. 예컨대 ‘동성애, 청소년에게 유해한가’라는 주제가 그 주의 논제라면(실제로 2004년 2월 8일자 방송의 주제였다),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100인의 배심원단이 찬반 버튼을 눌러 자신의 입장을 선택한다. 그리고 토론을 방청한 후 배심원단은 다시금 버튼을 눌러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는지를 표시한다.

그러니까 토론 전과 후에 찬반 투표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묘미라면 묘미였다. 토론 후에 재투표를 한다는 것은 결국 토론과정에서 양측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를 방청객에게 판단토록 한다는 취지였으리라. 그런데 흥미로웠던 것은 매번 찬성과 반대의 비율이 토론 전후에 항상 비슷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토론 전에는 해당 주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토론을 보고 난 후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든지, 혹은 그 역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더라는 얘기다. 하긴 그런 현상은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 봐도 납득이 된다. 나 역시 토론을 시청하기에 앞서 해당 주제에 찬반의 입장을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토론과정에서 상반된 입장의 논거를 이것저것 들어봐도 기존 견해를 완전히 바꾸게 되는 일은 드물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찬반논쟁을 해봤다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견해가 금세 뒤집혀 상대방에게 동조하게 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논쟁을 통해 상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서로를 ‘말이 안 통하는 인간’으로 비난하며 얼굴만 붉히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 나아가 타인을 설득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생각처럼 쉽고 간단하다면 세상이 그토록 복잡한 세대갈등, 이념갈등, 종교갈등 때문에 골머리를 썩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언어권에 속한 사람끼리 ‘말이 안 통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정확한 발음과 문법의 규칙을 따른다면 적어도 말이 통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너하고는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라고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논리다. 즉, 나는 너의 말에서 아무런 논리성을 발견할 수 없거나 너의 논리에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논쟁이라는 일종의 대치상황에서 우리의 목적은 주로 상대방의 주장이 가진 논리적 결함을 찾아내는 데 집중된다. 대체로 논쟁의 승패는 어느 쪽이 보다 완결된 논리를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곤 한다. 상대방의 반론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약점을 더 크게 부각시켜 나의 약점을 가리지 못한다면 논쟁에서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격렬한 토론 현장일수록 상호간에 네거티브 전략으로 논쟁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일단 이기고 봐야겠기에 상대의 주장이 가진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면도날 같은 논리로 상대를 제압한다고 해서 곧 그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상대방의 허점을 지적한들, 상대의 말문을 막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얻지는 못 한다. 논쟁에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상대방을 꺾는 것과 그를 설득해 나의 주장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 너 잘 났다. 그래도 난 동의 못 해.’ 겉으론 웃으면서 악수하겠지만 논쟁의 결말은 대개 이런 식이다. 본디 인간은 이성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논리적 오류를 즉각 수정하는 합리적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이성 또는 합리성이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는 생각은 서구 근대가 낳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신화다. 역설적이게도 합리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것만큼 불합리한 생각도 없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완벽한 삼각형’이 현실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하듯이 ‘이성적 인간’ 역시 이데아의 형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고 간주하는 편이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더 유효한 관점이다. 나 자신도, 나와 논쟁하는 상대편도 모두 이성적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이란 그저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그럴 듯하게 정당화하는 고도의 포장술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이성의 역할은 생각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 논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는 승리감이 아니라 나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라면, 내가 사용해야 할 주무기는 냉철한 이성과 논리적 무장이 아니다.

상대방의 오류를 낱낱이 밝혀주면 그가 정신이 번쩍 들어 나에게 동조하리라는 생각은 오만하기까지 한 계몽주의자의 착각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가 근본적으로 호소해야 할 영역은 그의 이성이라기보다는 감성이다. 이성적인 설득은 그 자체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정서적인 공감과 결부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나와 타인 간에 공감의 지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 아무리 칼 같은 논리나 현란한 수사(修辭)도 공허한 말잔치에 그치고 만다.

공감의 지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나의 입장을 잠깐 내려놓고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의 허점을 찾기보다 그의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둘째, 내가 먼저 상대에게 공감하지 않는 한 상대 역시 나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다. 나는 상대방을 타파해야 할 논적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마음을 얻어야 할 동반자로 생각하는가?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그를 향해 먼저 공감의 마음을 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다르다. 오로지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내가 먼저 그의 편이 되어보고자 노력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이념 간, 갑을 간의 갈등은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사태가 초래된 것은 우리 사회에 합리성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공감능력의 심각한 결핍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바 서로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태는 언어의 불통(不通)이나 논리의 불통이기에 앞서 마음의 불통을 뜻하는 것이리라.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결국 둘 중에 힘이 센 쪽이 이기는 것이 현실의 법칙이다. 말이 안 통하고 힘이 통하는 사회,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그런 정글 같은 세상이 아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2015.03.16

인문학 | 설득의 기술은 공감에 있다

이선열 | CIO KR
지금은 종영했지만 약 10여 년 전 TV에서 방영한 프로그램 중에 <100인 토론>이라는 것이 있었다. 매회 특정 사회적 이슈를 정하여 초청패널이 찬반 논쟁을 벌이는 전형적인 시사토론 방송이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개성은 패널 외에 100인의 일반인 방청객이 참여해 토론 전후에 찬반 투표를 한다는 데 있었다. 예컨대 ‘동성애, 청소년에게 유해한가’라는 주제가 그 주의 논제라면(실제로 2004년 2월 8일자 방송의 주제였다), 토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100인의 배심원단이 찬반 버튼을 눌러 자신의 입장을 선택한다. 그리고 토론을 방청한 후 배심원단은 다시금 버튼을 눌러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는지를 표시한다.

그러니까 토론 전과 후에 찬반 투표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보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묘미라면 묘미였다. 토론 후에 재투표를 한다는 것은 결국 토론과정에서 양측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었는지를 방청객에게 판단토록 한다는 취지였으리라. 그런데 흥미로웠던 것은 매번 찬성과 반대의 비율이 토론 전후에 항상 비슷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토론 전에는 해당 주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토론을 보고 난 후 반대 입장으로 돌아선다든지, 혹은 그 역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더라는 얘기다. 하긴 그런 현상은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 봐도 납득이 된다. 나 역시 토론을 시청하기에 앞서 해당 주제에 찬반의 입장을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토론과정에서 상반된 입장의 논거를 이것저것 들어봐도 기존 견해를 완전히 바꾸게 되는 일은 드물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찬반논쟁을 해봤다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좀 더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견해가 금세 뒤집혀 상대방에게 동조하게 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논쟁을 통해 상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서로를 ‘말이 안 통하는 인간’으로 비난하며 얼굴만 붉히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 나아가 타인을 설득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것이 생각처럼 쉽고 간단하다면 세상이 그토록 복잡한 세대갈등, 이념갈등, 종교갈등 때문에 골머리를 썩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엄밀하게 말하면 같은 언어권에 속한 사람끼리 ‘말이 안 통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정확한 발음과 문법의 규칙을 따른다면 적어도 말이 통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너하고는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라고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논리다. 즉, 나는 너의 말에서 아무런 논리성을 발견할 수 없거나 너의 논리에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논쟁이라는 일종의 대치상황에서 우리의 목적은 주로 상대방의 주장이 가진 논리적 결함을 찾아내는 데 집중된다. 대체로 논쟁의 승패는 어느 쪽이 보다 완결된 논리를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곤 한다. 상대방의 반론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약점을 더 크게 부각시켜 나의 약점을 가리지 못한다면 논쟁에서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격렬한 토론 현장일수록 상호간에 네거티브 전략으로 논쟁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일단 이기고 봐야겠기에 상대의 주장이 가진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면도날 같은 논리로 상대를 제압한다고 해서 곧 그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상대방의 허점을 지적한들, 상대의 말문을 막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얻지는 못 한다. 논쟁에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상대방을 꺾는 것과 그를 설득해 나의 주장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 너 잘 났다. 그래도 난 동의 못 해.’ 겉으론 웃으면서 악수하겠지만 논쟁의 결말은 대개 이런 식이다. 본디 인간은 이성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논리적 오류를 즉각 수정하는 합리적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

이성 또는 합리성이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는 생각은 서구 근대가 낳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신화다. 역설적이게도 합리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것만큼 불합리한 생각도 없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완벽한 삼각형’이 현실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하듯이 ‘이성적 인간’ 역시 이데아의 형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성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고 간주하는 편이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더 유효한 관점이다. 나 자신도, 나와 논쟁하는 상대편도 모두 이성적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이성이란 그저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그럴 듯하게 정당화하는 고도의 포장술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서 이성의 역할은 생각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 논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는 승리감이 아니라 나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라면, 내가 사용해야 할 주무기는 냉철한 이성과 논리적 무장이 아니다.

상대방의 오류를 낱낱이 밝혀주면 그가 정신이 번쩍 들어 나에게 동조하리라는 생각은 오만하기까지 한 계몽주의자의 착각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가 근본적으로 호소해야 할 영역은 그의 이성이라기보다는 감성이다. 이성적인 설득은 그 자체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정서적인 공감과 결부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나와 타인 간에 공감의 지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 아무리 칼 같은 논리나 현란한 수사(修辭)도 공허한 말잔치에 그치고 만다.

공감의 지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나의 입장을 잠깐 내려놓고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의 허점을 찾기보다 그의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둘째, 내가 먼저 상대에게 공감하지 않는 한 상대 역시 나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다. 나는 상대방을 타파해야 할 논적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마음을 얻어야 할 동반자로 생각하는가?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그를 향해 먼저 공감의 마음을 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다르다. 오로지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내가 먼저 그의 편이 되어보고자 노력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이념 간, 갑을 간의 갈등은 극단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런 사태가 초래된 것은 우리 사회에 합리성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공감능력의 심각한 결핍이 아닐까. 앞서 언급한 바 서로 간에 ‘말이 통하지 않는’ 사태는 언어의 불통(不通)이나 논리의 불통이기에 앞서 마음의 불통을 뜻하는 것이리라.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는 결국 둘 중에 힘이 센 쪽이 이기는 것이 현실의 법칙이다. 말이 안 통하고 힘이 통하는 사회,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그런 정글 같은 세상이 아니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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