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5

인문학 | 이성과 탐욕

이선열 | CIO KR
흔히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말하곤 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은 자연의 일부이자 동물세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지만, 우리는 인간을 그 밖의 자연존재와 본질적으로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른 짐승과 비교할 때 인간은 특별하다는 믿음, 그러므로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우월함을 이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영혼과 이성을 갖추고 있기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만이 가진 독자적인 특징을 도덕성에서 찾았다. 그는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은 매우 적은데 보통사람은 그것을 잃어버리지만 군자는 보존한다”고 말하면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같은 도덕적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다. 그렇게 볼 때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휴머니즘이란 곧 이성과 도덕성을 지키고 보존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으로 이성과 도덕성을 꼽는 것은 오늘날 꽤나 식상한 대답이 되어버렸다. 현대의 동물행동학과 진화생물학은 인간이 그저 ‘조금 더 똑똑한 원숭이’에 불과함을 속속 증명하고 있고, 최첨단 뇌신경과학의 연구성과는 우리가 이성적 도덕적 선택이라 믿는 행동이 사실 호르몬과 뇌신경의 생리적 반응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물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견해를 맹신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어쨌든 전가의 보도처럼 이성과 도덕성을 들먹이며 인간성의 표지로 삼는 태도는 이제 너무 진부해 보인다.

오히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특성은 이성이나 도덕성 같은 고상한 어떤 것이 아니라 탐욕이 아닐까? 탐욕이란 필요를 넘어선 지나친 욕심을 일컫는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 종을 관찰해 보라. 동식물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자원을 소비하는 타고난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생존법칙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절묘한 균형과 공존의 법칙이 함께 존재한다. 인간이 갖다붙인 그 어떤 이성이나 도덕성 없이도 자연은 그 나름의 가장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 오히려 그 무언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공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당사자는 인간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필요를 넘어서는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며 자연의 묵계를 깨뜨린다.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진보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아니라 탐욕인지도 모른다. 고고학자 로널드 라이트는 진보하는 인류 문명에 내재된 역설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에 더불어 인간이 만든 문명은 진보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한 무리의 구석기 원시인들이 어느 날 매머드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를 죽이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인류는 그만큼 진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보가 계속되어 200 마리의 매머드를 절벽으로 몰아 한꺼번에 죽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인류는 너무 지나치게 진보한 것이다. 그들은 잠시 동안 먹을 것이 넘쳐나는 풍족한 삶을 살겠지만 이내 굶어 죽을 운명에 처하고 만다. 이런 역설이 바로 로널드 라이트가 말하는 ‘진보의 함정’이다.

한 때 번성했으나 쇠락한 여러 문명들, 이를테면 이스터 섬이나 수메르, 로마, 마야 문명의 흥망성쇠는 발전과 파산을 반복하는 진보의 패턴을 증명한다. 그들 문명은 대체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번성하였으나 그 번성의 조건을 스스로 소진해버림으로써 무너졌다. 그처럼 문명의 진보는 그 토대를 이루는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자멸하는 패턴을 되풀이해왔다. 과거에는 그것이 특정한 지역 문명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했지만,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문명에서 인류가 맞이하게 될 파국은 그저 하나의 지역 공동체의 손실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숙주인 지구를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조차 자멸할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매트릭스>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매트릭스 세계의 관리자 스미스 요원이 납치해온 인간 모피어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닫게 된 사실을 알려주고 싶군. 자연계의 종을 분류하다 보니 너희 인간들이 사실은 포유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반해 너희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 너희는 한 지역으로 이동해서 그 곳의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번식하지. 그러니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이 지구상에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증식하는 유기체가 하나 더 있네. 그게 뭔지 아나? 바로 바이러스야. 인류는 포유류가 아니라 질병이야. 지구의 암덩어리이자 역병이지.”

인간은 과연 만물의 영장인가, 질병인가? 멈추지 않는 오늘날의 진보가 머지않아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는 징후는 이곳저곳에 명백하다. 기이한 것은 이러한 폭주기관차에 몸을 실은 인류가 열차를 늦추려 하기보다 오히려 폭주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를 이처럼 ‘진보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주범은 무엇인가. 인간이 진정 이성적인 존재라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할 리 없다. 인간이 진정 도덕적인 존재라면 이 맹목적인 진보의 발걸음에 짓밟히는 수많은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할 리 없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이란 얼마나 오만하고 위선적인 허울인가. 문명의 파괴성을 버젓이 목도하면서도 공멸의 길로 질주하길 멈추지 않는 인간의 본질은 탐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시대, 마지막 번영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나마 최선의 상태라면 인류가 적정한 수준에서 진보를 통제하여 문명과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과연 인류가 더 늦기 전에 절제와 검약의 미덕을 배울 수 있을까? 별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오늘날 세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희망의 근거는 희박하고 절망의 근거는 압도적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탐욕과 소비를 실존의 조건으로 규정하는 이 새로운 코기토 명제의 시대에 절제와 검약이라는 단어는 이제 옛스럽다 못해 촌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 촌스러운 방식 이외에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라도 있는가? 탐욕이 아니라 이성과 도덕성이야말로 진정 인간됨의 증거라고 믿는다면, 인간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만물의 으뜸가는 영장이라고 자부한다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지금처럼 절실한 때가 없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2014.09.15

인문학 | 이성과 탐욕

이선열 | CIO KR
흔히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말하곤 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사실 인간이라는 종은 자연의 일부이자 동물세계의 한 구성원일 뿐이지만, 우리는 인간을 그 밖의 자연존재와 본질적으로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른 짐승과 비교할 때 인간은 특별하다는 믿음, 그러므로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우월함을 이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영혼과 이성을 갖추고 있기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만이 가진 독자적인 특징을 도덕성에서 찾았다. 그는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은 매우 적은데 보통사람은 그것을 잃어버리지만 군자는 보존한다”고 말하면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같은 도덕적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다. 그렇게 볼 때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휴머니즘이란 곧 이성과 도덕성을 지키고 보존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동물과 다른 인간의 특징으로 이성과 도덕성을 꼽는 것은 오늘날 꽤나 식상한 대답이 되어버렸다. 현대의 동물행동학과 진화생물학은 인간이 그저 ‘조금 더 똑똑한 원숭이’에 불과함을 속속 증명하고 있고, 최첨단 뇌신경과학의 연구성과는 우리가 이성적 도덕적 선택이라 믿는 행동이 사실 호르몬과 뇌신경의 생리적 반응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물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견해를 맹신하는 것은 경계해야겠지만, 어쨌든 전가의 보도처럼 이성과 도덕성을 들먹이며 인간성의 표지로 삼는 태도는 이제 너무 진부해 보인다.

오히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특성은 이성이나 도덕성 같은 고상한 어떤 것이 아니라 탐욕이 아닐까? 탐욕이란 필요를 넘어선 지나친 욕심을 일컫는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 종을 관찰해 보라. 동식물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자원을 소비하는 타고난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냉혹한 생존법칙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절묘한 균형과 공존의 법칙이 함께 존재한다. 인간이 갖다붙인 그 어떤 이성이나 도덕성 없이도 자연은 그 나름의 가장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돌아간다. 오히려 그 무언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공존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당사자는 인간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필요를 넘어서는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며 자연의 묵계를 깨뜨린다.

원시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진보를 가능케 했던 원동력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아니라 탐욕인지도 모른다. 고고학자 로널드 라이트는 진보하는 인류 문명에 내재된 역설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에 더불어 인간이 만든 문명은 진보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한 무리의 구석기 원시인들이 어느 날 매머드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를 죽이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인류는 그만큼 진보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진보가 계속되어 200 마리의 매머드를 절벽으로 몰아 한꺼번에 죽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인류는 너무 지나치게 진보한 것이다. 그들은 잠시 동안 먹을 것이 넘쳐나는 풍족한 삶을 살겠지만 이내 굶어 죽을 운명에 처하고 만다. 이런 역설이 바로 로널드 라이트가 말하는 ‘진보의 함정’이다.

한 때 번성했으나 쇠락한 여러 문명들, 이를테면 이스터 섬이나 수메르, 로마, 마야 문명의 흥망성쇠는 발전과 파산을 반복하는 진보의 패턴을 증명한다. 그들 문명은 대체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번성하였으나 그 번성의 조건을 스스로 소진해버림으로써 무너졌다. 그처럼 문명의 진보는 그 토대를 이루는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자멸하는 패턴을 되풀이해왔다. 과거에는 그것이 특정한 지역 문명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했지만,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문명에서 인류가 맞이하게 될 파국은 그저 하나의 지역 공동체의 손실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숙주인 지구를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조차 자멸할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매트릭스>에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매트릭스 세계의 관리자 스미스 요원이 납치해온 인간 모피어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닫게 된 사실을 알려주고 싶군. 자연계의 종을 분류하다 보니 너희 인간들이 사실은 포유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데 반해 너희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 너희는 한 지역으로 이동해서 그 곳의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번식하지. 그러니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이 지구상에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증식하는 유기체가 하나 더 있네. 그게 뭔지 아나? 바로 바이러스야. 인류는 포유류가 아니라 질병이야. 지구의 암덩어리이자 역병이지.”

인간은 과연 만물의 영장인가, 질병인가? 멈추지 않는 오늘날의 진보가 머지않아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는 징후는 이곳저곳에 명백하다. 기이한 것은 이러한 폭주기관차에 몸을 실은 인류가 열차를 늦추려 하기보다 오히려 폭주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를 이처럼 ‘진보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주범은 무엇인가. 인간이 진정 이성적인 존재라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지속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할 리 없다. 인간이 진정 도덕적인 존재라면 이 맹목적인 진보의 발걸음에 짓밟히는 수많은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할 리 없다. 그러니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이란 얼마나 오만하고 위선적인 허울인가. 문명의 파괴성을 버젓이 목도하면서도 공멸의 길로 질주하길 멈추지 않는 인간의 본질은 탐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시대, 마지막 번영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나마 최선의 상태라면 인류가 적정한 수준에서 진보를 통제하여 문명과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과연 인류가 더 늦기 전에 절제와 검약의 미덕을 배울 수 있을까? 별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오늘날 세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희망의 근거는 희박하고 절망의 근거는 압도적이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탐욕과 소비를 실존의 조건으로 규정하는 이 새로운 코기토 명제의 시대에 절제와 검약이라는 단어는 이제 옛스럽다 못해 촌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 촌스러운 방식 이외에 달리 생각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라도 있는가? 탐욕이 아니라 이성과 도덕성이야말로 진정 인간됨의 증거라고 믿는다면, 인간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만물의 으뜸가는 영장이라고 자부한다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지금처럼 절실한 때가 없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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