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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교양

인문학 | 우리 시대의 인문학

2014.08.14 이선열   |  CIO KR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분다는 말이 자주 귀에 들린다. 인문학 열풍? 그것 참 생경한 단어의 조합이다. 예로부터 ‘인문학’에 조강지처처럼 따라붙는 단어는 ‘위기’이곤 했는데, 난데없이 ‘열풍(熱風)’이라니, 이 듣기만 해도 핫한 단어는 ‘월드컵’이나 ‘한류’ 같은 훌륭한 어휘들과 짝해야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던가.

생각건대 이 어리둥절한 현상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50만부라는 기적의 판매고를 올리며 우리 사회에도 인문학이 범국민적으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시작된 것 같다.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대략 그 무렵부터의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서점가에는 쉽게 쓴 인문서를 표방하는 책이 적잖이 나와 있고 인문학을 강의하는 대중강연이나 매체도 늘어났다. 또 저술과 강연을 주로 하는 일부 인문학자들의 경우 아이돌 부럽지 않은 팬을 거느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기업조차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재를 원한다고 공언할 정도니 가히 인문학의 열풍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 인문학의 열기가 정말 그렇게 뜨거운가? 인문학 공부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처지로서야 당연히 위기보다 열풍이라는 말이 듣기는 좋다. 다만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열풍은커녕 약간의 훈풍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유독 전공자들만 작금의 인문학 열풍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한 형국이랄까. 오히려 인문학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자들은 요즘처럼 위기가 위협으로 느껴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인문학은 예로부터 항상 위기였다. 그렇지만 지금 강단의 인문학자들이 체감하는 위기는 늘 입버릇처럼 되뇌던 만성화된 위기보다 훨씬 심각해 보인다. 이른바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대학마다 인문학 과목은 줄줄이 폐강되는 중이고, 학교 당국은 취업률 제고에 도움이 안 되는 인문학과를 폐지하기 위해 혈안이다. 취업에 불이익을 겪는 대다수 인문학 전공생들은 어쩔 수 없이 전과를 택하거나 복수전공을 희망한다. 수요가 줄어드는만큼 인문학과 교수직도 점점 줄어들어 선생들 역시 만년 시간강사 처지에 투잡 쓰리잡으로 생계를 꾸리는 형편이다. 이런 현실에서 학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열풍이란 말 그대로 인문학을 말려 죽이는 열사(熱邪)의 바람일 뿐이다.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고사하는 동안 대중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 각광받은 이 기이한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교육연구기관이라기보다는 취업준비기관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대학에서 인문학이 쓸모없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고전적인 이상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고, 이른바 인문학적 가치는 이 시대의 대학이 추구하는 ‘글로벌 스탠다드’ 학교발전전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아카데미에서 천대받는 인문학이 학문 바깥의 영역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갈수록 학교에서는 인문학을 배우기도 힘들고 가르치기도 힘들어지니 학교 바깥에서 인문학의 소통을 바라는 요구가 커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존재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야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가 욕망하는 인문학과 이 사회에 쓸모있는 인문학이 서로 만나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한국사회가 욕망하는 인문학에는 몇 개의 층위가 있다. 가장 저열한 층위에 패션으로서의 인문학, 수식어로서의 인문학이 있다. 인문경영, 인문마케팅, 인문학 스펙, 인문학 만점 논술···. 인문학을 갖다 붙이면 돈벌이가 될 거라 믿는 환상이 있다. 인문학을 최신 유행하는 장신구처럼 걸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욕구가 있다. 거기에 부응해 고전의 구절 몇 마디를 떼어다가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지적 패션산업이 있다. 그렇게 아무 성찰도 반성도 없이 가벼운 재치와 여흥으로 채워진 인문학 코스프레가 상업주의와 결탁해 구매자들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상품으로 유통된다. 작금의 인문학 열풍이 속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빈정거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 해도 가까스로 일기 시작한 인문학의 열기를 일시적인 유행이나 허상으로만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보다 더 깊은 층위에는 우리가 과연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은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답을 구하고픈 대중의 갈망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정상적인 사고와 감수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오늘날 앞뒤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배금주의 사회에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뜨거웠던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노라고,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종용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인문학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란다. 그 목소리가 크던 작던 그러한 요구를 감지하였다면 인문학자들은 그에 응답해야 한다. 인문학이 쓰임새를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상아탑에서 광장으로 이동할 때, 인문학자들 역시 강단에서 내려와 저잣거리로 향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인문학이 어렵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든 노자의 도덕경이든 읽어봐야 무슨 말인지 영 모르겠고,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학자들이 쓴 해설서를 읽어보면 그건 더 어렵다. 결국 인문학은 난해한 것이라는 낭패감에 처음부터 손사래를 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사람들은 인문학이란 공부해봐야 답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곤란한 질문만 잔뜩 던져 놓고 시원스레 답은 내놓지 않는 인문학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불만도 비등하다. 그러다보니 대중이 원하는 것은 알기 쉬운 인문학, 재미있는 인문학, 해답을 제시하는 인문학이다.

정당한 불만일 수 있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화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것을 어렵게 말하기는 쉬워도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전문가끼리 척 하면 통하는 이야기를 문외한도 알아듣게끔 말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과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만을 소비하고 싶어하는 대중의 태도가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만 들으려고 하는 태도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금 확인하고 싶어하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고 내게 익숙한 세계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유아론적(唯我論的)인 생각에 불과하다.

알지 못했던 것, 생각지 못했던 것, 익숙하지 않았던 세계와 조우할 때 우리는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처음엔 당연히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고 오로지 익숙하고 편한 것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인문학을 배우려는 것일까? 인문학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어렵고 힘들어서 손사래를 칠 거라면 수영은 어떻게 배우며 골프는 어떻게 배우겠는가?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공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가보지 못한 경계를 넘어서려는 각오, 인문학적 근육을 키우는 단련의 과정 없이 단박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그런 인문학의 수준이 오죽하겠는가? 그렇게 얻어들은 인문학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자신의 무지와 무감각을 일깨워 앎의 경계를 확장하겠다는 최소한의 결의도 없이 그저 쉽고 재미있는 오락꺼리를 찾는다면 차라리 책을 덮고 주말 저녁 TV를 켜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인문학은 질문만 던지고 답이 없다는 불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인문학의 본령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쳐 특정한 대답을 얻어내었다 할지라도 정말 그 답이 그러한지를 다시 묻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무는 것, 어쩌면 그 과정을 통해 궁극의 대답을 구하기보다는 궁극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인문학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에 과연 더 이상의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완결된 대답이 있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질문이 없고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을 때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궁극의 대답이 아니라 그저 도그마일 따름이다. 종교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신을 믿되 신이 어디에 계신지를 끊임없이 되묻지 않는 신앙은 허약한 신앙이다. 또한 신의 말씀을 믿되 내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는 신앙인은 참되지 않다. 궁극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질문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자신의 목표를 모두 달성한 사람은 목표를 너무 낮게 정한 사람이다”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죽기 직전까지 비즈니스 파트너와 회의를 할 정도로 굉장한 야심가였던 카라얀다운 발언이다. 인문학적인 질문과 관련하여 그의 말을 살짝 바꿔보고 싶다.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을 모두 구한 사람은, 아마도 너무 쉬운 질문을 던진 사람일 것이다. 인문학은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구하고 다시 더 정교한 질문을 던지는 끝없는 여정이다.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인문학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인문학은 곧 질문학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조미료 잔뜩 쳐서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패스트푸드 인문학이 아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잊혀질 경구 몇 마디로 사람들의 지친 영혼을 건성으로 위로하는 힐링캠프 인문학도 아니다. ‘묻지마’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인문학이 진정으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묻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사람들이 외면하고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그 불편하고 어려운 질문을 귀찮도록 상기시키는 일이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공군사관학교, 숭실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에 관련된 논문을 쓰고 강의를 해왔으나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동방사상과 인문정신>(공저)이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고전 시리즈로 박제가의 <북학의>를 편역한 적이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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