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6

인문학 | 절충안의 함정

김민철 | CIO KR
학생들에게 글쓰기와 토론을 가르치다 보면 서구권에서 공부한 학생들과 우리나라에서 공부한 학생들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구권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만 공부한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할 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그리고 가능하면 언제나 중재안 내지 절충안을 택하곤 한다.

사실 학생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까닭은 우리의 암울한 교육적 풍토 때문이다. 서구권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엉뚱한 대답을 하더라도 일단 “정말 훌륭하구나.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니?”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대응한다. 설사 그 대답이 정말로 문제가 많은 것이고, 그에 대한 진지한 지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반면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정해진 정답을 맞힌 자만이 우등생으로 대접받는다. ‘틀린’ 대답을 하면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체벌과 같은 모욕적인 대접을 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정답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진 최상위권의 학생들이나 이른바 ‘돌아이’ 기질이 있는 학생들이 아니면 혼이 나거나 비난을 받는 일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다투고 있던 두 하인 모두에게 “네가 옳다”라고 말한 황희 정승처럼, 명확하지 않은 태도를 보임으로써 칭찬은 아니라도 비난만은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이든 토론이든 간에 논쟁의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중재안을 선호한다면 논쟁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가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셈이 된다. 논쟁의 양 당사자가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면, 서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장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하거나 혹은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 지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중재안을 택할 경우 그런 생생한 배움의 기회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논술이나 자기소개서의 작성 혹은 면접과 같이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에서 절충안을 택하는 것은 대체로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절충안을 택할 경우, 수험생들은 “내년에 해결책이 마련되거든 다시 오게!”와 같은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절충안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낙태에 관한 논쟁을 들어 보도록 하자. 낙태에 관해서는 극단적인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낙태를 허용하자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당연히 모든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법규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절충안이 존재한다.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해 임신이 된 경우, 기형아 출산의 위험이 있는 경우, 그리고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경우 등에 한해 임신 28주 이내에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물으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절충안을 선호한다. 아마 대다수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절충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분위기에서는 명확하게 자기 의견을 발표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모든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주장을 개진하면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따져 들어가 보면 문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절충안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핵심 논점은 태아를 온전한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 보느냐 여부다.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모든 경우에 낙태를 허용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반면 사람으로 본다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충돌하는 것은 생명권과 행복권이기 때문이다. 강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무리 산모가 괴롭다 하여도, 결국 침해되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보다 무겁다고 할 수 없는 행복권인 것이다. 태어날 생명을 위해서, 그가 불행할 것이기 때문에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의사 표명이 힘든 중증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보기에)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그를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충안의 경우는 어떠한가? 태아는 어느 시점부터 사람이 되는가? 분명 그들은 어느 시점인가부터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충론자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합의는 힘들다는 사실이다. 자기 집단 내부에서조차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상태에서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절충안이란 새로운 문제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논술 답안에 절충안을 써 놓으면, 나는 “그래서 어떤 기준에 따라 절충해야 한다는 말인지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군요. 이런 시험지를 보면 채점자는 기준이 마련되면 내년에 다시 오라는 말을 하고 싶어집니다”라고 충고하곤 한다.

일부 우수 학생들이 ‘정답’을 독점하고, ‘오답’을 말하면 욕먹고 매 맞는 사회 풍토에서 자란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내세우지 못하고, 따라서 격렬한 논쟁을 통해 따져 묻고 비판 받아가며 배울 기회를 상실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한국 교육의 놀라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경우에조차 토론 과정에서 그들이 내리는 결론은 물론, 사례까지도 무섭도록 획일적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창의성이란 언제나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된다. 라이트 형제나 에디슨, 혹은 <해저 2만리>의 작가인 쥘 베른과 같은 사람들은, 적어도 그들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는, 비정상적인 미친놈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천재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고 자신감 있게 개진할 수 있는 풍토이며,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오답인 듯해도 이유를 묻고 먼저 칭찬을 한 후 정중하게 질문과 비판을 가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튀지 않기 위해 절충안을 선택하는 학생들의 슬픈 모습은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인들에게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복지부동을 추구하고,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중산층을 대변하며, 국민 전체를 포용하는 좋은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다. 야당을 택하는가 여당을 택하는가에 따라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선진국과 달리, 공약이라는 것이 거기에서 거기이니 누구를 뽑아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다. 하긴 그들 역시 절충안을 택하게 만드는 풍토에서 교육받고 성장해 왔으니 그것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는가? 그러나 원인이 그러하다면 후세들은 그렇지 않도록 해야 그들과 국가의 미래에 서광이 비출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2014.06.16

인문학 | 절충안의 함정

김민철 | CIO KR
학생들에게 글쓰기와 토론을 가르치다 보면 서구권에서 공부한 학생들과 우리나라에서 공부한 학생들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구권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만 공부한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할 뿐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그리고 가능하면 언제나 중재안 내지 절충안을 택하곤 한다.

사실 학생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까닭은 우리의 암울한 교육적 풍토 때문이다. 서구권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엉뚱한 대답을 하더라도 일단 “정말 훌륭하구나.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니?”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대응한다. 설사 그 대답이 정말로 문제가 많은 것이고, 그에 대한 진지한 지적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반면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정해진 정답을 맞힌 자만이 우등생으로 대접받는다. ‘틀린’ 대답을 하면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체벌과 같은 모욕적인 대접을 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정답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진 최상위권의 학생들이나 이른바 ‘돌아이’ 기질이 있는 학생들이 아니면 혼이 나거나 비난을 받는 일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다투고 있던 두 하인 모두에게 “네가 옳다”라고 말한 황희 정승처럼, 명확하지 않은 태도를 보임으로써 칭찬은 아니라도 비난만은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이든 토론이든 간에 논쟁의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이 중재안을 선호한다면 논쟁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가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셈이 된다. 논쟁의 양 당사자가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면, 서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장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하거나 혹은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 지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중재안을 택할 경우 그런 생생한 배움의 기회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논술이나 자기소개서의 작성 혹은 면접과 같이 당락이 결정되는 시험에서 절충안을 택하는 것은 대체로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절충안을 택할 경우, 수험생들은 “내년에 해결책이 마련되거든 다시 오게!”와 같은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절충안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낙태에 관한 논쟁을 들어 보도록 하자. 낙태에 관해서는 극단적인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낙태를 허용하자는 주장이며, 다른 하나는 당연히 모든 낙태를 금지하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법규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절충안이 존재한다.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해 임신이 된 경우, 기형아 출산의 위험이 있는 경우, 그리고 산모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경우 등에 한해 임신 28주 이내에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물으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절충안을 선호한다. 아마 대다수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절충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분위기에서는 명확하게 자기 의견을 발표한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모든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주장을 개진하면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따져 들어가 보면 문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절충안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핵심 논점은 태아를 온전한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 보느냐 여부다.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모든 경우에 낙태를 허용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반면 사람으로 본다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충돌하는 것은 생명권과 행복권이기 때문이다. 강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무리 산모가 괴롭다 하여도, 결국 침해되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보다 무겁다고 할 수 없는 행복권인 것이다. 태어날 생명을 위해서, 그가 불행할 것이기 때문에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의사 표명이 힘든 중증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보기에) 불행해 보인다고 해서 그를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충안의 경우는 어떠한가? 태아는 어느 시점부터 사람이 되는가? 분명 그들은 어느 시점인가부터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충론자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합의는 힘들다는 사실이다. 자기 집단 내부에서조차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상태에서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절충안이란 새로운 문제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논술 답안에 절충안을 써 놓으면, 나는 “그래서 어떤 기준에 따라 절충해야 한다는 말인지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군요. 이런 시험지를 보면 채점자는 기준이 마련되면 내년에 다시 오라는 말을 하고 싶어집니다”라고 충고하곤 한다.

일부 우수 학생들이 ‘정답’을 독점하고, ‘오답’을 말하면 욕먹고 매 맞는 사회 풍토에서 자란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내세우지 못하고, 따라서 격렬한 논쟁을 통해 따져 묻고 비판 받아가며 배울 기회를 상실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한국 교육의 놀라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경우에조차 토론 과정에서 그들이 내리는 결론은 물론, 사례까지도 무섭도록 획일적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창의성이란 언제나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된다. 라이트 형제나 에디슨, 혹은 <해저 2만리>의 작가인 쥘 베른과 같은 사람들은, 적어도 그들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는, 비정상적인 미친놈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천재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고 자신감 있게 개진할 수 있는 풍토이며,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오답인 듯해도 이유를 묻고 먼저 칭찬을 한 후 정중하게 질문과 비판을 가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튀지 않기 위해 절충안을 선택하는 학생들의 슬픈 모습은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인들에게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복지부동을 추구하고,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중산층을 대변하며, 국민 전체를 포용하는 좋은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다. 야당을 택하는가 여당을 택하는가에 따라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선진국과 달리, 공약이라는 것이 거기에서 거기이니 누구를 뽑아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다. 하긴 그들 역시 절충안을 택하게 만드는 풍토에서 교육받고 성장해 왔으니 그것이 어찌 그들만의 탓이겠는가? 그러나 원인이 그러하다면 후세들은 그렇지 않도록 해야 그들과 국가의 미래에 서광이 비출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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