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7

인문학 | 믿음의 가치와 겸손의 필요성

김민철 | CIO KR
우리와 알고 지내는 많은 여자들은 집사람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넘어 시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만도 하다. 인터넷 상에서 집사람의 닉네임은 ‘팔자죠은 ~여사’인데, 우리 사는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말하곤 한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집사람은 우리 집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혼자 장을 본 적도 없다. 언제나 내가 퇴근 후에 귀가하며 장을 보아다 주기 때문이다. 이제 9살, 7살인 두 아이의 목욕도 언제나 내가 시키곤 한다.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목록을 적어 아빠에게 보여주곤 한다. “제일 먼저 해 주어야 할 것은 아빠 표 볶음밥이구요, 그 다음에는 불고기, 그 다음에는 탕수육, 그리고 매운 콩나물 무침과 꿀 오뎅이에요. 엄마가 해 주는 것은 맛이 없어요”라고 말이다. 집사람도 가끔 “저 오늘 라볶이 먹고 싶어요”라거나 “막국수 해 주세요”라고 거들곤 한다.

아침잠이 많은데다가 아이들을 가졌을 때 입덧을 심하게 해서 몇 년 동안은 거의 모든 음식을 내가 하기도 했다. 덕분에 요리에 대한 소질을 발견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김치나 깍두기도 내가 담그는 것이 제일 맛있다는 데 장모님까지도 동의하곤 한다. 장인장모님이 가장 맛있게 드시는 음식도 바로 사위가 해 주는 것이다.

육아와 교육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아빠의 몫이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촌구석의 작은 학교와 유치원을 찾아 입학시켜놓고는 아이들을 매일 등하교시키는 것도 또한 아빠의 몫이다. 아내는 아이들과 자신이 입을 옷을 살 때, 심지어는 아이들 내복이나 속옷을 살 때에도 내게 결정을 맡기곤 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처음 쓴 교양서의 서문에 “앞으로 내가 무엇을 이루든 그 반은 집사람의 몫이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거니와 집사람 스스로도 아내를 기분 좋게 해 줄 목적으로 쓴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나는 슈퍼맨 아빠 같아 보이고, 아내는 팔자 좋은 마님 같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며, 날이 갈수록 그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고사를 잠시 인용할 필요가 있다.

전국시대 중국 위나라에 악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큰 인물이 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공부를 계속 하였다. 아내는 베를 짜서 살림을 책임졌고, 악양은 노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타지 생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악양이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는 자신이 짜던 완성 직전의 베를 단칼에 베어 보이면서, “베도 한 필이 완성되어야 쓸 모가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짜다가 말고 잘라버린 베를 살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과 학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이 무르익어야 그 사람이 천하에 소용되는 바가 있어, 그를 찾게 되는 법입니다”라고 훈계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7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통해 깊은 학문을 갖추게 하였다.

그런데 악양의 아들 악서는 위나라 옆의 작은 나라인 중산국이라는 곳에서 초빙을 받아 높은 관직을 살고 있었다. 악서는 아버지 역시 중산국으로 초빙하고자 하였으나, 악양은 오히려 “중산국의 임금이 포악하고 무도하니 그곳에서 벼슬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너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곳에서 벗어나도록 해라”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악서는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중산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모든 나라 가운데 특히 위나라가 부국강병에 힘써 천하 강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군주인 문후(文候)는 무도한 중산국을 정벌하여 국력도 확장하고 국가의 근심도 없애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총 책임을 맡을 인재를 물색하던 중,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악양을 천거하고, 문후는 그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 후 중산국 정벌의 중책을 맡긴다.

주색에만 탐닉하여 백성들에게 학정을 일삼던 중산국의 군주에게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위나라의 군대는 중산국 군대를 무찌르고 위풍당당하게 중산국의 도성 앞에 진을 쳤다. 이 때 중산국 군주는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불러,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대를 물리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악서는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을 아는지라 자신의 설득이 무용지물일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중산왕은 명령을 이행치 못하면 악서를 죽일 것이라고 말하여 악서는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예상대로 악양은 무도한 군주를 섬긴 악서를 심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악서는 자신이 왕에게 항복을 권할 것이니 한 달 동안만 말미를 달라고 애걸하였다. 악양은 허락하였고, 이러한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악양의 부장인 서문표가 부자의 정에 이끌려 부당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자, 악양은 “나는 중산국을 일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위나라의 땅으로 만들려는 계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요. 중산 백성들로 하여금 위나라가 강인할 뿐 아니라 관대하기도 하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마음으로 복종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요”라고 말하였고, 그제야 서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한 달이 흘러 악서가 성벽에 올라 다시 말미를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악양이 더욱 심하게 꾸짖으며 직접 활을 쏘아 아들을 맞추고자 했다. 당황한 악서가 도망쳐 사실을 고하자, 중산왕은 악서의 이용 가치가 다했음을 알고 그를 죽여 그 고기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내도록 한다. 자식의 죽음 앞에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서 계책을 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악양은 그 국을 받아 망설임 없이 다 먹으며 못난 아들을 꾸짖고 나서 드디어 중산국 정벌에 성공한다.

의기양양하게 개선한 악양에게 위문후는 커다란 상자를 주면서 집에 가서 열어보라 말했다. 온갖 보물이 들어 있으리라 예상한 악양이 상자 속에서 발견한 것은 뜻밖에도 무수히 많은 상소문이었다. 그것들은 악양이 자식인 악서와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격을 미루고 있으며, 결국 위나라를 배반할 것이니 불러 들어 벌하고 대장군을 교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악양은 무릎을 치면서 중산을 정벌한 데에는 자신이 아니라 위문후의 힘이 더 컸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을 발탁하고 끝까지 믿어준 위문후가 없었다면 자신은 헛되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옛날부터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악양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커다란 공을 세우긴 했지만, 그 상당 부분은 오롯이 그의 몫이 아니라 그를 알아보고 믿어 준 아내와 위문후 덕이었다.

나는 우리 집사람이 악양의 아내보다 더 훌륭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와 존경은 가히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가끔 친구들에게 농담 반으로 “너희도 종교를 좀 가져보렴. 그럼 마음이 편해질 거야”라고 말하곤 한다.

그녀를 만난 이후 나는 내 가치를 재발견한 셈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해도 그녀는 언제나 나의 판단을 믿고,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해주곤 한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더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미친 짓을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버텨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전적인 믿음과 지지로 결과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집사람의 믿음과 지원으로 내가 목표하고 계획하던 일들이 조금씩 이루어질 때마다, 나는 그것이 오직 내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느낀다. 때로는 그녀의 몫이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뜻을 펼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이 능력을 발휘하기까지 누구의 믿음과 지지가 있었는지를 말이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 강의를 듣고 많은 것을 얻었노라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너무나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쓴 글과 책의 가치를 알아주는 독자들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느낀다. 그들이 없다면 내 글과 강의는 무용지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변화라는 사람이 엄청난 옥의 원석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 원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당시 옥공들과 왕에 의해 그는 사기꾼으로 몰려 두 다리를 잘리고 만다. 왕이 바뀌고 변화는 다시 옥을 바치고 싶었으나, 다리가 없어 그럴 수 없자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변화를 불러 원석을 잘라 보니 어마어마한 가치의 옥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흔히 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몰라보는 옥을 분별하는 변화의 능력이 칭송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기꾼으로 몰려 다리마저 잘린 변화에게 다시 기회를 준 왕의 관대함과 포용력을 더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없었다면 변화도, 변화의 옥도 존재할 수 없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신뢰와 지지가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진 빚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자기 스스로 커다란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믿고 신뢰함으로써 그 능력이 세상에 꽃피게 하는 것 또한 능력자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재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2014.02.17

인문학 | 믿음의 가치와 겸손의 필요성

김민철 | CIO KR
우리와 알고 지내는 많은 여자들은 집사람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넘어 시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만도 하다. 인터넷 상에서 집사람의 닉네임은 ‘팔자죠은 ~여사’인데, 우리 사는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말하곤 한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집사람은 우리 집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혼자 장을 본 적도 없다. 언제나 내가 퇴근 후에 귀가하며 장을 보아다 주기 때문이다. 이제 9살, 7살인 두 아이의 목욕도 언제나 내가 시키곤 한다. 아이들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목록을 적어 아빠에게 보여주곤 한다. “제일 먼저 해 주어야 할 것은 아빠 표 볶음밥이구요, 그 다음에는 불고기, 그 다음에는 탕수육, 그리고 매운 콩나물 무침과 꿀 오뎅이에요. 엄마가 해 주는 것은 맛이 없어요”라고 말이다. 집사람도 가끔 “저 오늘 라볶이 먹고 싶어요”라거나 “막국수 해 주세요”라고 거들곤 한다.

아침잠이 많은데다가 아이들을 가졌을 때 입덧을 심하게 해서 몇 년 동안은 거의 모든 음식을 내가 하기도 했다. 덕분에 요리에 대한 소질을 발견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김치나 깍두기도 내가 담그는 것이 제일 맛있다는 데 장모님까지도 동의하곤 한다. 장인장모님이 가장 맛있게 드시는 음식도 바로 사위가 해 주는 것이다.

육아와 교육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아빠의 몫이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촌구석의 작은 학교와 유치원을 찾아 입학시켜놓고는 아이들을 매일 등하교시키는 것도 또한 아빠의 몫이다. 아내는 아이들과 자신이 입을 옷을 살 때, 심지어는 아이들 내복이나 속옷을 살 때에도 내게 결정을 맡기곤 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처음 쓴 교양서의 서문에 “앞으로 내가 무엇을 이루든 그 반은 집사람의 몫이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거니와 집사람 스스로도 아내를 기분 좋게 해 줄 목적으로 쓴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나는 슈퍼맨 아빠 같아 보이고, 아내는 팔자 좋은 마님 같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며, 날이 갈수록 그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고사를 잠시 인용할 필요가 있다.

전국시대 중국 위나라에 악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큰 인물이 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공부를 계속 하였다. 아내는 베를 짜서 살림을 책임졌고, 악양은 노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타지 생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악양이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는 자신이 짜던 완성 직전의 베를 단칼에 베어 보이면서, “베도 한 필이 완성되어야 쓸 모가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짜다가 말고 잘라버린 베를 살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과 학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이 무르익어야 그 사람이 천하에 소용되는 바가 있어, 그를 찾게 되는 법입니다”라고 훈계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7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통해 깊은 학문을 갖추게 하였다.

그런데 악양의 아들 악서는 위나라 옆의 작은 나라인 중산국이라는 곳에서 초빙을 받아 높은 관직을 살고 있었다. 악서는 아버지 역시 중산국으로 초빙하고자 하였으나, 악양은 오히려 “중산국의 임금이 포악하고 무도하니 그곳에서 벼슬을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너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곳에서 벗어나도록 해라”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악서는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중산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모든 나라 가운데 특히 위나라가 부국강병에 힘써 천하 강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자, 군주인 문후(文候)는 무도한 중산국을 정벌하여 국력도 확장하고 국가의 근심도 없애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총 책임을 맡을 인재를 물색하던 중,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악양을 천거하고, 문후는 그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 후 중산국 정벌의 중책을 맡긴다.

주색에만 탐닉하여 백성들에게 학정을 일삼던 중산국의 군주에게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위나라의 군대는 중산국 군대를 무찌르고 위풍당당하게 중산국의 도성 앞에 진을 쳤다. 이 때 중산국 군주는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불러,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대를 물리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악서는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을 아는지라 자신의 설득이 무용지물일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중산왕은 명령을 이행치 못하면 악서를 죽일 것이라고 말하여 악서는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예상대로 악양은 무도한 군주를 섬긴 악서를 심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악서는 자신이 왕에게 항복을 권할 것이니 한 달 동안만 말미를 달라고 애걸하였다. 악양은 허락하였고, 이러한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악양의 부장인 서문표가 부자의 정에 이끌려 부당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자, 악양은 “나는 중산국을 일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위나라의 땅으로 만들려는 계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요. 중산 백성들로 하여금 위나라가 강인할 뿐 아니라 관대하기도 하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마음으로 복종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요”라고 말하였고, 그제야 서문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한 달이 흘러 악서가 성벽에 올라 다시 말미를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악양이 더욱 심하게 꾸짖으며 직접 활을 쏘아 아들을 맞추고자 했다. 당황한 악서가 도망쳐 사실을 고하자, 중산왕은 악서의 이용 가치가 다했음을 알고 그를 죽여 그 고기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내도록 한다. 자식의 죽음 앞에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서 계책을 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악양은 그 국을 받아 망설임 없이 다 먹으며 못난 아들을 꾸짖고 나서 드디어 중산국 정벌에 성공한다.

의기양양하게 개선한 악양에게 위문후는 커다란 상자를 주면서 집에 가서 열어보라 말했다. 온갖 보물이 들어 있으리라 예상한 악양이 상자 속에서 발견한 것은 뜻밖에도 무수히 많은 상소문이었다. 그것들은 악양이 자식인 악서와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격을 미루고 있으며, 결국 위나라를 배반할 것이니 불러 들어 벌하고 대장군을 교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악양은 무릎을 치면서 중산을 정벌한 데에는 자신이 아니라 위문후의 힘이 더 컸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을 발탁하고 끝까지 믿어준 위문후가 없었다면 자신은 헛되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옛날부터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악양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커다란 공을 세우긴 했지만, 그 상당 부분은 오롯이 그의 몫이 아니라 그를 알아보고 믿어 준 아내와 위문후 덕이었다.

나는 우리 집사람이 악양의 아내보다 더 훌륭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 대한 그녀의 신뢰와 존경은 가히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가끔 친구들에게 농담 반으로 “너희도 종교를 좀 가져보렴. 그럼 마음이 편해질 거야”라고 말하곤 한다.

그녀를 만난 이후 나는 내 가치를 재발견한 셈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니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해도 그녀는 언제나 나의 판단을 믿고,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말해주곤 한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더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미친 짓을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버텨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전적인 믿음과 지지로 결과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집사람의 믿음과 지원으로 내가 목표하고 계획하던 일들이 조금씩 이루어질 때마다, 나는 그것이 오직 내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느낀다. 때로는 그녀의 몫이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뜻을 펼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이 능력을 발휘하기까지 누구의 믿음과 지지가 있었는지를 말이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 강의를 듣고 많은 것을 얻었노라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너무나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쓴 글과 책의 가치를 알아주는 독자들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느낀다. 그들이 없다면 내 글과 강의는 무용지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변화라는 사람이 엄청난 옥의 원석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그 원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당시 옥공들과 왕에 의해 그는 사기꾼으로 몰려 두 다리를 잘리고 만다. 왕이 바뀌고 변화는 다시 옥을 바치고 싶었으나, 다리가 없어 그럴 수 없자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변화를 불러 원석을 잘라 보니 어마어마한 가치의 옥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흔히 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몰라보는 옥을 분별하는 변화의 능력이 칭송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기꾼으로 몰려 다리마저 잘린 변화에게 다시 기회를 준 왕의 관대함과 포용력을 더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없었다면 변화도, 변화의 옥도 존재할 수 없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신뢰와 지지가 없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진 빚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자기 스스로 커다란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믿고 신뢰함으로써 그 능력이 세상에 꽃피게 하는 것 또한 능력자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재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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