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15

인문학 | 소크라테스 죽음의 진상과 '쇠파리'의 가치

김민철 | CIO KR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도 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자인 나로서는 그 이야기에 별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 이야기는 지나치게 편파적이다. 서양 사상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인 플라톤을 제자로 둔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스스로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 사람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의 내용에 당황한다. 의아한 그는 정치가, 시인, 엔지니어 등 그 사회의 엘리트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들이 자신보다 현명함은 명약관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 과정에서 그들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탁이 옳음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데다 그 사실조차 모르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최소한 스스로의 무식함은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탁의 진정한 의도를 깨달았다. 인간의 지혜란 보잘 것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지의 자각을 촉구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격언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선각자적 행동은 사람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고, 결국 사형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의 입장에서도 상황을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따져 묻기를 전문으로 하는 철학자로서, 그가 찾아갔던 엘리트들의 눈으로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골칫덩이가 하나 있다. 그럴싸한 말로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 권위자들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당혹스럽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 다짜고짜 캐묻기 시작한다. “정치란 무엇인가요?”, “백성을 이롭게 해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절대적 선의 존재와 당신이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를 아시나요?”와 같은 질문을 말이다.

불청객이지만, 막 대할 수는 없어 처음에는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배도 고프고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몰라요, 몰라”라고 말해버렸고, 그는 다소 실망한 듯도 하고 만족한 듯도 한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곧 다른 권위자들도 같은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의 위험성은 점점 커져갔다. 젊은이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권위자들과 윗사람들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따지고 묻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기로 여기기 마련인 것이 젊은이들인데, 그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제재를 가해야만 했다.


사실 한 발 물러서 보면 전자보다 후자 쪽이 훨씬 더 그럴싸해 보인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인 태도가 이를 방증한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은 냉철하게 읽기만 한다면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고집불통 골칫덩어리인가를 잘 보여준다.

고발당한 소크라테스는 유무죄를 가리는 1차 판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이제 형량을 결정하는 2차 판결만이 남았다. 당시 아테네의 재판 관습에 따르면, 유죄 선고가 내려진 후에는 원고와 피고가 각각 형량을 제안하고, 배심원들의 투표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원고 측에서는 사형을 제안한다.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 사회의 모든 권위자들을 희롱하다시피 하고, 젊은이들에게 모방심리를 조장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분노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이다. 유죄가 결정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마땅한 처벌은(현대적으로 번안해서 말하면) 최고급 호텔 뷔페 무료 시식권 10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처벌로 제안할 수는 없으므로, 현재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7,000원 정도의 벌금형을 제안한다고 말한다.

토론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그는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아독존적이고 안하무인 격으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독단론자에 불과하다. 현대의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토론의 기본조차 모르는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1차 판결과는 달리 2차 판결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이 결정된다. 아무리 억울하다 할지라도 분쟁 해결의 마지노선인 법정에서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다면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하는데, 법정의 판결마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인 양 무시하는 태도가 배심원들의 분노를 샀음에 분명하다.

내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이야기를 데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렇게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재구성해 본 덕분이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한 마디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쇠파리와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 것이다.

쇠파리는 소의 등에 앉아 피를 빤다. 소는 쇠파리를 물리치기 위해 연신 꼬리로 등을 때린다. 너무나 무디기 짝이 없는 소로 하여금 끊임없이 각성하게 만드는 존재인 쇠파리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스스로는 단지 정체되기 쉬운 사회를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에 의해 사회화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구성원으로 재충전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가장 적절하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보수적 성향은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대가가 존재한다.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새로운 사고를 통해 인류와 역사의 발전을 도모하는 창의적 인재들을 억압하는 것이다. 갈릴레이, 광해군, 정약용, 초기의 노예 해방론자들과 남녀 평등론자들 그리고 현대적으로는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희생자들이었다.

무뎌지기 쉬운 사회를 끊임없이 각성시키는 쇠파리들을 쉽게 단죄하고 축출해버리는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혁명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제 인류는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각성시키는 쇠파리와 같은 존재들을 포용할 줄 아는 사회만이 창의성뿐 아니라 건전성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배워 왔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그러한 쇠파리의 가치를 몰라보는 경우는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내가 아는 한 분은 제법 규모가 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데, 자신의 서비스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들은 모두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열심히 일하는 덕에 어느 정도 현상 유지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쇠파리들의 앵앵거리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면 관련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10년쯤 전에 대치동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논술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논술 수업에 매우 감동을 받은 한 학생이 나의 가르침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실천했나 보다. 어느 날 상담을 신청한 그 학생의 어머니가 “아이가 논술 수업만 받고 오면 한 시간 이상 이것저것 따져 묻고서야 직성이 풀려 해요”라고 말하기에, 나는 “논술의 목적이 그런 것입니다. 아이들이 당연한 것조차도 궁금해 하고 따져 묻도록 해 줌으로써 창의력을 길러주려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후부터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그 어머니의 목적은 아이의 창의성이 아니라 대입에서의 고득점이었다. 쇠파리의 앵앵 소리를 싫어하여 아이의 사고가 넓고 깊어지며, 자녀와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비단 개인적으로 내 주변에서 끝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나로 하여금 각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마치 사회의 적인 양 몰아가는 모습을 보면 한국 사회가 왜 아직도 선진적인 것으로 쉽게 인정받지 못 하는지, 왜 한국 사회의 퇴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게 들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회사든 국가든 간에, 쇠파리들의 앵앵거리는 소리를 귀찮아하지 말고 그것을 스스로 돌이켜 볼 기회로 삼을 때 그 사람과 집단은 고인 물의 신세를 벗어나 발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남들과 달리 내가 커다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2014.01.15

인문학 | 소크라테스 죽음의 진상과 '쇠파리'의 가치

김민철 | CIO KR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도 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자인 나로서는 그 이야기에 별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 이야기는 지나치게 편파적이다. 서양 사상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인 플라톤을 제자로 둔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스스로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 사람 가운데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의 내용에 당황한다. 의아한 그는 정치가, 시인, 엔지니어 등 그 사회의 엘리트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들이 자신보다 현명함은 명약관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 과정에서 그들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신들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탁이 옳음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데다 그 사실조차 모르지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최소한 스스로의 무식함은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탁의 진정한 의도를 깨달았다. 인간의 지혜란 보잘 것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지의 자각을 촉구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격언은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선각자적 행동은 사람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고, 결국 사형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의 입장에서도 상황을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따져 묻기를 전문으로 하는 철학자로서, 그가 찾아갔던 엘리트들의 눈으로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라는 골칫덩이가 하나 있다. 그럴싸한 말로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 권위자들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당혹스럽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 다짜고짜 캐묻기 시작한다. “정치란 무엇인가요?”, “백성을 이롭게 해 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시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절대적 선의 존재와 당신이 하고 있는 일과의 관계를 아시나요?”와 같은 질문을 말이다.

불청객이지만, 막 대할 수는 없어 처음에는 나름대로 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배도 고프고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몰라요, 몰라”라고 말해버렸고, 그는 다소 실망한 듯도 하고 만족한 듯도 한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곧 다른 권위자들도 같은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의 위험성은 점점 커져갔다. 젊은이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권위자들과 윗사람들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따지고 묻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기로 여기기 마련인 것이 젊은이들인데, 그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제재를 가해야만 했다.


사실 한 발 물러서 보면 전자보다 후자 쪽이 훨씬 더 그럴싸해 보인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인 태도가 이를 방증한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은 냉철하게 읽기만 한다면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고집불통 골칫덩어리인가를 잘 보여준다.

고발당한 소크라테스는 유무죄를 가리는 1차 판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이제 형량을 결정하는 2차 판결만이 남았다. 당시 아테네의 재판 관습에 따르면, 유죄 선고가 내려진 후에는 원고와 피고가 각각 형량을 제안하고, 배심원들의 투표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원고 측에서는 사형을 제안한다.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 사회의 모든 권위자들을 희롱하다시피 하고, 젊은이들에게 모방심리를 조장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분노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이다. 유죄가 결정된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마땅한 처벌은(현대적으로 번안해서 말하면) 최고급 호텔 뷔페 무료 시식권 10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처벌로 제안할 수는 없으므로, 현재 우리 돈으로 환산해서 7,000원 정도의 벌금형을 제안한다고 말한다.

토론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그는 상대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유아독존적이고 안하무인 격으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독단론자에 불과하다. 현대의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토론의 기본조차 모르는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1차 판결과는 달리 2차 판결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이 결정된다. 아무리 억울하다 할지라도 분쟁 해결의 마지노선인 법정에서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다면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하는데, 법정의 판결마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인 양 무시하는 태도가 배심원들의 분노를 샀음에 분명하다.

내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이야기를 데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렇게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재구성해 본 덕분이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한 마디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쇠파리와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 것이다.

쇠파리는 소의 등에 앉아 피를 빤다. 소는 쇠파리를 물리치기 위해 연신 꼬리로 등을 때린다. 너무나 무디기 짝이 없는 소로 하여금 끊임없이 각성하게 만드는 존재인 쇠파리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스스로는 단지 정체되기 쉬운 사회를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에 의해 사회화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구성원으로 재충전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가장 적절하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보수적 성향은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대가가 존재한다.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새로운 사고를 통해 인류와 역사의 발전을 도모하는 창의적 인재들을 억압하는 것이다. 갈릴레이, 광해군, 정약용, 초기의 노예 해방론자들과 남녀 평등론자들 그리고 현대적으로는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희생자들이었다.

무뎌지기 쉬운 사회를 끊임없이 각성시키는 쇠파리들을 쉽게 단죄하고 축출해버리는 사회는 고인 물처럼 썩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혁명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제 인류는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각성시키는 쇠파리와 같은 존재들을 포용할 줄 아는 사회만이 창의성뿐 아니라 건전성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배워 왔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그러한 쇠파리의 가치를 몰라보는 경우는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내가 아는 한 분은 제법 규모가 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데, 자신의 서비스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지만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들은 모두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열심히 일하는 덕에 어느 정도 현상 유지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쇠파리들의 앵앵거리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인다면 관련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10년쯤 전에 대치동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논술 강의를 할 때의 일이다. 논술 수업에 매우 감동을 받은 한 학생이 나의 가르침을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실천했나 보다. 어느 날 상담을 신청한 그 학생의 어머니가 “아이가 논술 수업만 받고 오면 한 시간 이상 이것저것 따져 묻고서야 직성이 풀려 해요”라고 말하기에, 나는 “논술의 목적이 그런 것입니다. 아이들이 당연한 것조차도 궁금해 하고 따져 묻도록 해 줌으로써 창의력을 길러주려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후부터 더 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그 어머니의 목적은 아이의 창의성이 아니라 대입에서의 고득점이었다. 쇠파리의 앵앵 소리를 싫어하여 아이의 사고가 넓고 깊어지며, 자녀와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비단 개인적으로 내 주변에서 끝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나로 하여금 각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마치 사회의 적인 양 몰아가는 모습을 보면 한국 사회가 왜 아직도 선진적인 것으로 쉽게 인정받지 못 하는지, 왜 한국 사회의 퇴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게 들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회사든 국가든 간에, 쇠파리들의 앵앵거리는 소리를 귀찮아하지 말고 그것을 스스로 돌이켜 볼 기회로 삼을 때 그 사람과 집단은 고인 물의 신세를 벗어나 발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남들과 달리 내가 커다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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