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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O / 인문학|교양

인문학 | 왜 포르노를 허하라고 주장하는가?

2013.11.15 김민철  |  CIO KR
<포르노를 허하라!>는 내가 2년 전에 쓴 교양서 제목이자, 그 책 1장의 테마이다. 그런 자극적인 제목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 개인 명의로 출판된 네 번째 저서이자 첫 번째 교양서인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판매량을 보이자,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학자이자 작가로서 자신의 글을 사람들이 많이 잃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며, 그렇지 못 하다면 당연히 슬픈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제목을 꼽았다. 우리나라에 출판계에서는 일단 책 제목에 ‘철학’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1,000부 이상이 팔리기 힘든 것을 당연시한다. 아무리 “땅에 내려왔음”을 강조해도 철학은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책은 그보다 몇 배 이상이 팔렸으니, 출판사에서도 나름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저자인 내게 증정본이 도착하기도 전에, 중앙 일간지 문화부 철학 전문 기자에게 전화가 와서 “이거 철학이 너무 땅에 내려온 것 아닙니까? 저는 벌써 거의 다 읽어갑니다”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하여 <저자초대석>에 실렸을 뿐 아니라, 공중파 라디오의 대담 프로그램에도 초청되기도 하는 등 여러 언론의 호평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욱 고무적이었던 것은 평생 전업주부이셨던 장모님이 내 책을 다 읽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학계에 있으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학문 선진국이란 전문 학자 계층과 일반 시민 간의 소통의 폭이 넓은 국가이다. 반대로 학문 후진국에서 학자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시민들은 그들의 담론을 다른 세계의 일로 치부하거나 혹은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외워야 하는 것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공지성(公知性)을 생명으로 하는 법학의 경우, 일반 국민들이 법전이나 판결문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철학계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심해서, 한글로 써 놓는다고 다 한글이 아님을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곤 한다. 가장 유명한 동양철학 개론서의 경우에조차 동양철학 전공자인 내가 읽어도 쉽게 이해가 안 간다면 할 말 다 한 셈이다.

나는 쉽게 읽을 수 있고,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을 쓰겠노라 나 자신과 내게 배운 학생들에게 약속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첫 번째 교양서였던 것이다. 나 스스로도 만족하고, 각계의 평도 좋았으며, 장모님까지도 어렵지 않게 읽었으니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는 마당에, 몇 천 부의 판매량이란 정말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백만 부 이상의 판매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비교가 되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번째 교양서의 제목은 최대한 섹시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첫 장의 주제를 책 전체의 제목에 가져다 쓴 것이다. 보수적인 출판사 사장님의 만류에도 고집을 부려 자극적인 제목과 표지를 고집했고, 결국 내 의견이 관철되었다. 나는 만족했고, 그 해 말에 그 책은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어 다시 한 번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노를 허하라!>의 판매량은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에도 크게 못 미쳤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이른바 출판사의 파워였다. 베스트셀러조차 출판사에서 만들어내는 현실에서,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 소식에도 홍보는커녕 문광부에서 사 주는 몇 백만 원어치의 책에 만족하는 군소 출판사의 실정 상, 어쩌면 더 이상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 하나 더 있었다. 들고 다니기에 신경이 쓰인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 배우는 학생들은 대개 대학을 졸업했고, 40살이 넘은 사람들도 간간히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 제목을 부담스러워한 것이다. 법조인을 희망하는 우리 사회의 최상위 엘리트 계층조차 그런 제목을 부담스러워한다면,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불문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왜 부담스러워하는지 물어보면 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적인 것에 대한 담론은 그저 터부시되는 영역에 속할 뿐이다. 많은 사회에서 아무 이유 없이 금기시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욕의 대다수가 성적인 것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혹자는 많은 사회에서 성적인 것이 터부시된다는 것 자체가 그 정당성을 방증한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적인 문화에 대한 스펙트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다. 정 반대편에는 성적으로 매우 개방되어, 청소년들이 가장 쉽게 접하는 놀이가 성적인 것인 사회도 존재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러한 사회에는 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욕이 없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욕이 만연한 사회보다 훨씬 인간관계가 우호적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 가능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성적인 터부를 가지고 있는 많은 문화권에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성적 영역에 대한 담론이나 표현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도 다양한 제약을 가한다. 과거에는 소설가들이 성적 표현을 빌미로 고초를 치르기도 했고, 한 미술 교사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자신과 부인의 누드사진을 올렸다가 기소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부분 완화되기는 했지만, 조금만 표현 수위가 높은 영화라도 나왔다 하면 어김없이 예술과 외설 논쟁이 등장한다.

하지만 반대편에서는 많은 분야에서 이른바 ‘섹스어필’을 조장한다. 영화에서는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수위가 조절된 여배우들의 알몸을 보이면서 그것은 예술이라고 주장하고, 신문과 포털들은 보일 듯 말 듯 한 옷을 입고, 성적인 암시를 주는 춤을 추는 연예인들이나 치어리더들의 모습을 마치 대단한 기사라도 되는 양 매일 보도해대면서 관음증을 조장한다.

남녀차별에 대한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이슬람권에서처럼 아예 몸 전체를 칭칭 둘러싸 가리던가, 아니면 일부 아마존 원주민들처럼 모두가 아예 벗고 산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금기시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매력인 양 떠벌이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성은 웃통을 벗어도 되고 여성은 모유수유를 하는 것조차 비난의 대상이 되며, 여성에게서 겨드랑이 털이 조금이라도 노출된다면 타인뿐 아니라 당사자까지도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전라의 배우들이 거리낌 없이 등장하는 영화를 TV에서조차도도 손쉽게 볼 수 있지만, 음모가 조금이라도 드러난 영화가 등장하면 사회가 악의 나락으로 빠지는 듯 흥분하곤 한다. 나로서는 그저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다.

과거 집사람이 벗고 노는 우리 아가들에게 “그러면 창피한 거야”라고 말했다가 내게 엄청난 핀잔을 받은 적이 있다. 내 주장은 자연스럽게 타고 난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쳐야지, 왜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주입시키냐는 것이었다. 한동안의 대화 끝에 집사람도 납득했고, 이후 최소한 우리 집에서는 모든 가족이 옷을 입고 벗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돈을 받고 스트립쇼를 공연하는 곳에서 벗은 몸은 관음증의 대상이지만, 누드비치에서 옷을 벗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유를 만끽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관음증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그런 곳에서조차 스스로의 몸을 부끄러워하며 다른 사람들의 몸을 훔쳐보지만, 자연스러움을 만끽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 한다.

모두가 옷을 벗고 다니자거나 성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스스로도 관음증 문화의 피해자이므로, 그렇게 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분명히 대답하지 못 하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 행위들에 대해 비난을 가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분명 다수의 횡포일 뿐이다.

2,000여 년 전, 맹자는 “식욕과 성욕은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자신은 성적인 욕구에 집착하는 병폐가 있노라고 고백한 한 왕에게 “그것은 병적인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성적으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백성들도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만족을 얻고자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인자의 정치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성적인 담론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어쩌면 맹자보다 후진적인 측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책을 통해 그러한 점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듣보잡 철학자의 자뻑”이라는 서평이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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