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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교양

인문학 | 극과 극은 통한다 - 상대주의의 함정

2013.09.13 김민철   |  CIO KR
지금은 어느덧 대학을 졸업한 조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조카는 길지도 않은 머리에 무스를 발라 세우고, 일자로 챙이 펴진 모자를 쓰며, 다리에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런 조카의 어머니와 할머니, 즉 나의 누나와 어머니는 언제나 그것을 불만스레 여기고 야단을 치곤했다. “너, 이놈의 자식! 복장이 그게 뭐고, 머리가 그게 뭐야?”

조카는 서슬에 눌려 입만 내민 채 아무 말도 못했지만, 필자는 그렇게 야단치는 것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아니, 머리를 저렇게 하고, 저런 옷을 입어서 안 되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더 나이 먹으면 저렇게 하고 다니라 해도 안 해”라고 말했다. 나의 반론에 접한 두 기성세대의 반응은 논리를 무시하고 권위와 힘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필자의 논변에는 귀를 막은 채, 나의 옹호에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는 조카에게 “어쨌든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학생이면 학생다워야지”라고 다시 못을 박곤 했다.

맥락은 다르지만 유사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우리 집사람의 친한 친구 하나가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미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잠시 귀국한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내게 적극적으로 선교를 시도했다. 내가 철학자인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몇 차례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자 했으나, 그녀는 전혀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의 완곡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믿어야 함을 인정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인지라, 결국 나는 그녀에 대해 논리적 공격을 시작했다. 나는 그녀 주장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성경을 거론하며 다른 근거를 대고자 했지만, 나는 그러한 반응까지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결국 그녀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녀는 울상이 되었고, 나는 웃으며, “그만 하지요”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아니에요, 어쨌든 하나님은 곧 진리이시고, 그분을 믿어야 하는 것은 당연해요”라고 말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어쨌든”이라는 말로 결론이 났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런 표현을 쓴다면 앞의 모든 논의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그 사람에게 애초에 대화 따위는 무의미했다. 무조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했을 뿐이다. 논변은 요식행위였으며, 논변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지 못하면 결국은 권위나 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 혹은 자신의 국가, 나아가 자신의 문화만이 옳다고 맹신하는 독단적인 절대주의자들의 전형적 태도이자 문제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태도는 소수 엘리트 혹은 독재자의 지배 논리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 대한 서구의 우월적 지위와 만행을 정당화하는 도구의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타 문화권에 대한 경쟁적인 억압과 착취가 극에 달했던 20세기 초의 비극적인 두 번의 세계 대전, 그 가운데 특히 근거 없는 우월의식에 기초하여 무고한 수백만 명의 생명을 가스실로 보냈던 오만함은 인류로 하여금 그러한 독단적인 태도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상대주의다. 모든 주장 혹은 문화나 관습은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이 아닌 것이다. 사상적으로 20세기는 상대주의의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주의는 관용의 대명사였다. 이는 아직도 상당 부분 진행형이다. 학생들과의 토론 수업을 포함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주의라는 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한 환상이 아직도 지배적임을 실감하게 된다.

상대주의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지극히 교과서적이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상대주의를 관용의 사상이라고 부르면서, “하지만 지나친 상대주의에 빠질 경우 회의주의에 이르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다. 교과서의 설명이 합리적이려면 회의주의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지, 지나친 상대주의에 이르지 않고 관용의 사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이 분명히 언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과서의 설명은 거기에서 끝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상대주의에 대해 따져 물으면 그들은 “그러면 교과서의 내용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당신이 교과서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묻곤 한다. 외관상 나는 일종의 함정에 빠진 셈이다.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주제 모르는 교만한 학자로 치부되겠고,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하는 한심한 선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상대주의를 신봉하는 그들의 태도가 뭔가 “어쨌든”을 외치던 앞의 사례와 유사하지 않은가?

사실 상대주의라는 이론은 자체로 성립 불가능하다. 역설적인 것이다. 상대주의자는 절대주의의 독단을 지적하면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성과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독단과 억압 및 폭력을 낳고 정당화할 뿐이다. 모든 주장과 문화 및 관습은 타자의 잣대에 의해 평가 및 비교 불가능한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 우열을 가릴 수는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기준으로 타자를 비판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무비판적으로 바라보면 정말 그럴싸하고 관용적인 태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과연 논리적이고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가? 타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던 그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던 그는 최소한 자신의 주장만은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우열을 비교할 수 없다던 그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는 사실 동전의 양 면이다. 불간섭을 표방한다는 면에서는 절대주의와 다른 듯하지만, 대화의 단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상대주의도 결국은 힘의 논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다른 국가들에게 “각자에게는 각자의 역사가 있다. 그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라며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일본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민족사관이 상대에게는 식민사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일본의 “진출”이 우리에게는 “침략”이듯이, 광개토대왕의 “진출” 역시 누군가에게는 “침략”일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권의 대표적 보수 인사에 속하는 김문수씨와 이재오씨가 과거 보수진영으로부터 “빨갱이”라고 불릴 정도의 극좌에 속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아야만 쉽게 이해 가능하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덕목을 중용에서 찾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넘치는 것 역시 모자라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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