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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교양

인문학 | 대규모 사회와 소규모 사회의 토양

2013.04.12 김민철   |  CIO KR
나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촌에 살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온 결정적 계기는 아이들이었다. 아파트에 살던 우리 부부는 아주 단순하게 아가들이 마당에서 뛰어 놀면 좋겠다는 생각에 촌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상상을 뛰어 넘는 행복한 삶을 살던 중, 작년 말 큰아이의 취학통지서가 나왔다.
 
우리 아이들은 이전에 어떤 교육 기관도 경험하지 못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도 가 본 적이 없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그 나이의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어른들처럼 억지로 눈을 부비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만큼 자고, 하루 종일 여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아이들은 행복했다.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교육 시설에 보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맞벌이를 하거나, 혼자 아이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도 그것이 최선일까? 시설에 근무하는 교사의 사랑이 부모의 그것보다 클 수는 없고, 따라서 아이들은 엄마아빠와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나와 집사람이 아무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노는 것을 좋아해도, 두 명의 아이를 하루 종일 끼고 있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부터 “애 볼래, 밭 맬래?”라고 물으면 누구나 밭 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교육자가 어려운 길을 선택할수록 교육은 올바른 길로 갈 가능성이 높음을 말이다. 나는 집사람과 그런 철학을 공유했고, 실천했다. 우리 아이들은 너무 건강하고 예절바르면서도 행복해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남매를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또래들과 어울리는 교육기관에 다니다 보면, 동생과 놀 시간도 별로 없을뿐더러, 동생과의 놀이가 재미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붙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둘은 가장 친한 사이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특별한 금지 사유가 없는 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대체로 허용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규칙은 남매간에 다투거나 좋지 않은 언사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나의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되었고, 덤으로 순박하면서도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반가워하는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학통지서는 아이들 교육에서 커다란 분기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20년 넘게 학원과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한 나로서는 한국의 교육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대치동의 학원가에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한 아이가 “전쟁이 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고 하는 소리니?”라고 묻자, 그 아이는 “설마 지금보다 불행하겠어요?”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아이들이 공부에 치여 힘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대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끔찍한 경험이었다.
 
한국 부모들의 유례없는 교육열은 사실 자녀가 경쟁에서 승리하고 사회생활에서 성공하는 데 따른 대리만족감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부모들은 “다 너희를 위해서야”라고 말하곤 하지만, 정말 그것이 자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성공이란 행복과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치원 때부터 무한 경쟁에 휘몰려, 제도권 교육과 사교육을 합하여 10여 시간 이상씩 이른바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아이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성공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쉽사리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시기의 행복을 유보하라고 강요받았다. 그렇게 해서 상위권으로 사회에 진출한다 해도,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과의 또 다른 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좋은 음식도 어릴 때부터 맛보지 못하면 그 맛을 음미하기 쉽지 않다. 햄이나 햄버거, 라면, 피자 등의 음식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청국장이나 장아찌의 깊고 그윽한 맛을 즐길 능력을 기르기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사랑과 행복에 파묻혀 살기보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삶의 여유나 인간관계의 향기를 향유하는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학교를 보내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고 아이도 동의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학교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힘으로써 상황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대비책을 세워 두고 있었다. 학교에 보내야 한다면 전교생이 1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교육청에 전화를 하고, 해당 학교를 찾아가는 등의 노력의 통해 배정받은 읍내의 학교가 아니라 현재 아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동생은 그 학교의 병설 유치원에 다닌다.
 
이 역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뿐 아니라, 대중교통편이 없어 매일 차로 등하교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더 힘든 길을 택한 그만큼, 아니 그 이상 아이들은 행복하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오래된 미래>>에서 통찰한 바대로, 대규모 사회와 소규모 사회는 그 토양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규모 교육에서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대체로 무수한 동년배들과 함께 지낸다. 부모의 눈에도 그렇겠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동년배란 친구이면서 경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아이의 입장에서도 어떤 측면에서든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나보다 나은 친구라 할지라도 그에게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것이다. 경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하나의 경쟁자를 극복하고 넘어서면 그 너머에는 또 다른 경쟁자가 있기 마련이다. 최소한 상당수를 물리칠 때까지는 만족이란 없으며, 경쟁은 생활화된다. 어린 시절부터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만이 행복의 지름길이며, 인생은 끝없는 전쟁터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중학교 때 상위권 성적을 내면, 특목고나 자사고를 목표로 공부해서 경쟁자들을 이겨내야 하고, 그곳에 가면 또 일류대를 가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돈과 권력이 따르는 직업을 잡기 위해서 경쟁해야 한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진급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른 나이에 잘리지 않기 위해 또 경쟁을 해야 한다. 인생은 긴장된 경쟁의 연속이다. 평화롭고 행복한 삶, 진정한 인간관계란 찾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이란 그저 적이거나 이용 대상일 뿐이다. 그런 인생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정상에 서더라도, 행복하기 힘들다.
 
반면 적은 수의 아이들만이 함께 생활하는 작은 규모의 학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동년배의 숫자가 매우 적으므로 그들 사이에 깊은 친밀감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뿐 아니라, 몇 살 위아래의 또래집단과도 함께 어울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든 놀이든 간에 형/오빠나 언니/누나에게 배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며,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역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언제나 잘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다. 같은 학교나 동네의 어린 동생이 커다란 실수를 하거나 다치면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배움을 받고 가르치면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보다 큰 ‘나’를 위해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경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전체적인 토양은 양보와 협동의 정신을 배우기에 보다 적합하다.
 
도시에서 학교 밖의 사회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정글이다. 가까이는 등하교 길에서, 그리고 크게는 삶 자체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들 대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서로에게 관심도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주치며 살아가는 도시라는 비면식공간은 타인을 배려하는 온화하고 유덕한 인격이 성장하기에 좋지 못한 토양이다. 학교에서는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는 유덕한 사람이 될 것을 교육하지만, 도시라는 대규모 비면식 공간은 유덕함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될 수 없다. 유덕함에 대한 보상과 부덕함에 대한 처벌이 너무나 우연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그저 피하고 만다.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다.
 
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촌에는 적은 경우 수십에서 많아야 수백 가구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가 산재해 있다. 수백 가구짜리 마을 몇 개를 합해 봤자 도시의 작은 아파트 단지 하나도 되지 않는다. 자기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옆 마을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두 서로를 알고 있다. 이런 공동체에서의 생활 모습은 도시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어른을 만나면 당연히 인사를 해야 한다. 의견 충돌이 있어도 자기만을 너무 내세워 극단적인 다툼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버스를 타고 갈 때 어른이 타시면 당연히 일어서야 한다. 타인을 무시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위를 했다가는 왕따를 당하게 되어 그곳에서의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를 알고 있는 소규모 면식 공간에서 유덕한 행위에는 언제나 칭찬과 환대라는 보상이 따르기 마련이고 부덕한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과 질시라는 처벌이 따르기 마련이다. 뉘 집 자식은 예절이 바르더라는 소문은 그 집 가족 전체가 그 마을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또한 성립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증언하듯이, 전통적인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행위자 자신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유덕한 행위에 대한 보상과 부덕한 행위에 대한 처벌이 필연적인 관계가 있음을 체득하게 된다. 그런 토양에서 성장한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유덕한 행위 자체가 습관화되어 제 2의 천성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덕한 행위 자체를 즐기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여가 지난 지금, 나는 이와 같은 통찰이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님을 경험하고 있다. 두 녀석 모두 넉넉한 인간관계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행복한 학교/유치원 생활을 하고 있다. 가지 말라 해도 가겠다고 난리다. 준비물을 비롯한 모든 필수품을 학교와 유치원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더 힘든 길을 택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하는 부모에게 돌아오는 이자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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