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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딜레마 상황과 자기희생

2013.03.15 김민철  |  CIO KR
경찰 ‘이집념’은 5년간의 추적 끝에 11명의 여성을 살해한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인 ‘김교살’을 검거하였다. 정황으로 보아 그가 살인범임은 분명하다. 그는 이미 두 명의 여성을 더 납치하여 감금하여 두었다. 그로부터 이틀 내에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생명마저 극도의 위험상황에 놓일 것이 분명하다. 김교살은 납치 여성들의 소재는커녕,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교살은 겁이 많고 고통에 매우 약하다. 그에게 어느 정도 이상의 고문을 가한다면 그가 범행 일체와 증거물 및 납치 여성들의 소재까지도 자백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문은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어 있다. 이집념은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해 경찰로서 무력감을 느낀다.  

위에 서술한 가상의 내용은 도덕적 혹은 법적 딜레마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말 뜻 그대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칸트의 말로 대표되는 의무론적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고문은 금지되어야 한다.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이라는 모토에 따라 사회 전체의 최대한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어떨까? 일견 공리주의적 입장에 설 경우 고문을 순순히 허용해야 할 듯하다. 피해를 입는 사람은 김교살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에 처한 데 반해, 그가 입는 피해의 정도도 충분히 조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딜레마 상황은 괜히 딜레마가 아니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도 함부로 고문을 허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 가운데 하나는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사유할 줄 아는가 여부이다. 근시안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경우에 고문을 허용하는 것이 공리에 부합할 듯하지만, 인간은 역사를 통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배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문을 허용하는 것은 선례로 남는다. 일종의 판례나 관습법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문은 “공리에 부합하는 어떤 상황” 하에서는 허용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에 부합한다는 것은 위험한 기준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이 성전환 수술을 하고자 할 때 혹은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하고자 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공리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금지하고자 할 수도 있다. 성적 소수자는 그야말로 소수이고, 다수가 불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공리에 부합하는 조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긴 머리나 짧은 치마조차도 동일한 명분하에 금지되었던 것이다.


고문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고문의 주체는 언제나 시민사회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정권 혹은 그 산하기관이기 마련이고, 부패라는 속성에 노출되기 쉬운 권력의 속성 상, 고문에 대한 유혹은 너무나 강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것이 공리에 부합하는 상황인가에 대한 판단 역시 그들의 수하에 맡겨질 것이 뻔하다. 상황 판단에 대한 엄격성은 갈수록 희석되기 마련이고, 무고한 시민들의 인권에 대한 침해가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고문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정확히 말해 이는 공리주의적 논거에 해당하는 것이다.

역시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역사는 인간에게 무수한 교훈을 준다. 우리는 2,000년도 넘은 역사적 사건에서 이러한 딜레마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춘추시대 남방의 강대국인 초나라의 문왕은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작은 나라의 제후가 방자하게 굴었다 하여 그에게 벌을 내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 벌이란 것이 그 제후를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천하게 떨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초나라에는 육권이라는 현명한 충신이 있었다. 육권은 왕에게 덕으로 이름을 떨쳐야지, 그렇게 포악한 행위를 통해 얻은 위엄은 장기적으로 국익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고집스런 왕은 이미 내린 결정을 철회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자 육권은 칼을 빼 왕의 목에 겨누고서 명령을 거둘 것을 요구한다. 왕이 어쩔 수 없이 명령을 거두자, 육권은 “폐하, 불충하게 폐하의 목에 칼을 겨눈 저를 벌하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 문왕은 ‘문(文)’이라는 시호를 얻을 정도로 초나라 부흥의 기틀을 다진 왕이다. 그는 “일신의 욕심이 아니라 충성심에서 나온 행동임을 알거늘 어찌 그대를 벌하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육권을 용서한다. 그러나 육권은 “왕께서 저를 용서하실지라도, 저 스스로가 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자가 용서받는다면 그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에는 작은 빌미만으로도 왕을 위협하는 신하들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스스로의 발목을 잘랐다.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형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집념이 처한 상황은 육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육권 역시 국가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왕을 말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대의 방자한 신하들을 위한 전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육권이라는 현자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딜레마 상황을 기가 막히게 해결하였다. 육권의 전례에 따르고자 한다면, 최소한 자신의 다리 하나는 자를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집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진정으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자기희생을 전제하는 것으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김교살에게 고문을 가하여 사건을 해결한 후, 스스로 다리를 자르는 것에 준하는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사회에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역사에 옳지 못한 전례를 남긴 사람으로 기록되고자 하지 않는 열망의 정도가 곧바로 자기희생의 엄격성으로 연결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고한 사람이라면 자살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고,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고 선고할 것을 스스로 요구할 수도 있다(물론 이 경우 사회는 그의 요구에 따라 주어야 한다).
 
많은 사회 문제는 누군가의 자기희생으로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관련된 사람들이 아무도 책임감을 가지고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는 데에서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특히 그 주체가 육권이나 이집념과 같은 공무원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쩌면 육권의 경고는 그러한 정도의 책임감이 없이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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