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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옳고 그름이 아닌 멀고 가까움

2012.04.16 김민철   |  CIO KR
생긴 것과 달리 필자는 비위가 약하다. 100킬로그램에 가까운 거구임에도, 가리는 음식이 너무나 많다. 물론 조미료가 들어간 것과 같은 자극적인 음식도 싫어하지만, 내장탕이나 돼지국밥처럼 일반적으로 냄새가 역한 음식도 잘 먹지 못한다. 장모님이 처갓집에 찾아오는 사위를 두려워할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은가?

그런 필자가 특별히 더 싫어하는 음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순대국밥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어릴 때 어쩌다 외식을 할 때면,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순대국밥을 먹자고 제의할 때가 있었다. 필자는 기겁을 했지만, 가족들은 “야, 이 바보야.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네가 몰라서 그래.”라고 말하면서 타박을 주곤 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비위에 거스르는 음식인데다가 좋지 않은 기억까지 있으니 그 음식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은 비단 필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축구광은 축구가 얼마나 좋은 스포츠이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고 거품을 문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춤을 좋아하는 사람도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과 다른 기호를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한 번쯤 구박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음주를 강권하는 문화를 당연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런 우리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인상적인 영화가 있다. 매우 오래 전에 제작되었고, 최근에 다시 리메이크된 <혹성탈출>이라는 영화다. 영화에서 우주비행사인 주인공은 정체 미상의 혹성에 불시착한다. 그런데 그 혹성은 원숭이가 지배하고 있고, 인간은 원숭이에게 사육을 당한다. 원숭이는 언어를 사용하여 문화와 기술을 향유하지만, 인간은 그저 짐승일 뿐이다. 주인공을 생포한 원숭이들은 언어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인간을 신기해하며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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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 혹성은 바로 미래의 지구다. 인류의 지배욕이 가져온 핵전쟁의 폐허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필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어떤 여성을 사랑하게 된 주인공을 보고 원숭이들이 “어머, 저 추한 인간도 사랑이란 것을 하나봐!”라고 놀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너무나 로맨틱한 모습으로 키스를 한다.

영화를 보지 못한 분이라도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갈 것이다. 김태희와 이병헌의 키스와 원숭이들의 키스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낭만적인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만 해당될 뿐, 원숭이에게는 다르다. 우리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김태희도 원숭이에게는 그저 우리가 암컷 원숭이를 바라보는 것 이상의 감흥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원숭이에게는 원숭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도 더 지난 옛날에 살았던 장자라는 천재 사상가는 인간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렇게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지적하고 있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 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다. 미꾸라지도 또한 이러한가? 사람은 나무 위에 올라가면 떨어질까 무서워 벌벌 떤다. 원숭이도 또한 이러한가?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거처를 아는가? 사람은 소나 돼지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의 골을, 솔개와 갈가마귀는 쥐를 맛있게 먹는다. 이 넷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을 아는가? 편저(猵狙)원숭이는 암놈원숭이와 짝하고, 고라니는 암사슴과 짝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더불어 논다. 사람들은 [전국시대의 미인인] 모장과 여희를 좋아하지만, 물고기가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숨고, 새가 그들을 보면 높이 달아나고, 사슴이 그들을 보면 마구 도망친다. 이 넷 중에 무엇이 진정한 미모를 아는가?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실마리나 시비판단(是非判斷)의 길도 마구 얽히고 뒤섞였으니, 내가 어찌 그것을 변별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인의도덕이란 현대어로 말하자면 ‘정의’와 같은 말이다. 모든 집단은 자신들의 의견만이 올바르고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임금 협상을 하게 되면 “정의롭게 잘 해 봅시다”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막상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문제에 도달하면 자신들의 이익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장자는 그 원인을 시비(是非)라는 말의 어원과 그 의미의 변화로 설명한다. 흔히 “시비를 가린다”라고 할 때 쓰는 이 말의 의미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라고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시(是)는 원래 ‘옳을 시’가 아니라 ‘이것 시’이며, 그 반대말은 ‘저것 피(彼)’이다. ‘옳고 그름’을 뜻하는 시비(是非)라는 말은 원래 시피(是彼)에서 파생된 것이다. 시(是)와 피(彼)의 관계와 의미는 영어의 this와 that의 그것과 정확히 상응한다. 전자는 자신에게 가까운 것을, 그리고 후자는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가까운,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옳은 것, 좋은 것으로 여기고,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彼)의 입장을 그른 것, 나쁜 것으로 여긴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추구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자기 정당과 그 지지자들이 지향하는 바를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라고 떠벌이고, 반대 정파의 주장과 의견을 치졸하고 천박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옳은 것, 좋은 것이 실제로는 내게 가깝고 익숙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돌이켜본다면, 그래서 인간에게 공평무사하고 보편타당한 시각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인간은 좁은 소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반성해 보면 우리는 좀 더 겸손하고 관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커밍아웃을 선언했던 홍석천이 주변의 질시를 견디다 못해 방송을 떠나면서 했던 말이 필자의 귀에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제가 단지 여러분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보기 싫으시다면, 저는 이제부터 방송에 나오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슬픈 절규를 강요하는 일이 더 이상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하였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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