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6

인문학 | 정치와 도덕

김민철 | CIO KR
평소에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말들을 꼽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앞서 설명했던 형이상학은 물론이거니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말들조차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이러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그래야 아는 척했다가 무식이 탄로나는 비극적 사태를 막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다루어 볼 것은 정치와 도덕이라는 개념이다(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개념’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란다. 쉽게 자가진단해볼 수 있는 방법은 그 말을 대신할 수 있는 어휘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 자리에 ‘어휘’, ‘단어’, ‘말’ 등이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개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사용하는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말들이 주는 뉘앙스를 먼저 생각해 보자. ‘도덕’이라는 개념은 뭔가 멋져 보이면서도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느낌을 주는 반면, ‘정치’라는 개념은 어딘지 세련돼 보이면서도 진실하지 못한, 사기의 냄새가 풍기기도 한다. 이는 기회주의적인 철새 정치인들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두 개념의 본질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초기 칼럼에서 설득하려면 사례를 들라고 강조한 바 있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알기 쉬운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대북 정책에 있어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로 민주당 정권과 김대중-노무현 정권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양자 가운데 어느 쪽이 남북관계에 대해 정치적 해결을 추구한 것일까?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표현한 것에 착안해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자는 남북 관계를 선악의 틀 속에서 다루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남한과 미국은 선이며, 그 반대편에 있는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악이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 등의 틀 속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정치일까 아니면 도덕일까? 그것이 후자임은 이제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덕이 가치의 판단과 관련된 문제임도 이해 가능할 것이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6.15 공동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상대방을 일단 악으로 규정해버리면 남은 것은 투쟁뿐이다. 선을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악을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악으로 지목된 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폭력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상대방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대화와 소통이 문제 해결의 방식이 될 것이다. 정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부시와 이명박 정권은 북한 정권의 붕괴를 목표로 삼는다. 절대악 그 자체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대화와 소통을 통한 평화와 공존을 목표로 한다.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일방적인 목표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와 사이 공간에 대한 인정에 기반하여 합의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도덕과 정치를 단순화시켜 비교해 보면, 도덕은 전근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의 잔재이고, 정치는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명령이나 우주의 보편 원칙과 같은 개념에서 탈피한 근대의 정신은 바로 합의와 계약인 것이다. 그리고 합의와 계약의 기본 전제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 다시 말해서 다원성에 대한 인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문에서는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명시하고 있다. 남과 북 양 측이 현재 채택하고 있는 체제를 인정하고, 그 체제를 상호 인정하면서 교류를 확대해 나아가면서 평화와 공존을 공고히 하자는 것이다.

국회에서도 특정 정당이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대화나 합의 자체를 거부하고 시위를 벌이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정치가 실종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행태는 선악을 나누어 선을 실현하고 악을 근절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도덕’이라는 개념에서 다소 고리타분한 뉘앙스가 풍기는 것은 그 개념이 가진 전근대성 때문이다. 학생이나 자식의 의견을 묵살하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태도는 도덕적인 것이다.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단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더불어 살아감의 가치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도덕적 태도를 버리고 오직 정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듯하다. 평화와 공존 이상의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정치’라는 개념에서 풍기는 부정적 인상은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을 대화와 합의로 풀어가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인가?

현재 우리는 안정된 민주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군부독재의 시퍼런 서슬 하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일이지만, 12시가 넘으면 밖에 나가지도 못 했고, 노래 가사가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송이 금지되었으며, 대머리인 연기자가 출연을 정지당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목숨을 바쳐 싸운 많은 민주 투사들과 그에 힘을 실어준 시민들의 투쟁 덕이다. 만약 그들이 자유로운 민주사회라는 이상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독재자들과 정치적인 타협을 추구했다면 어떨까? 더 거슬러올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에게 왜 정치적인 해결을 추구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까? 불의와 정치적 타협을 추구하는 자들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이제 피상적이나마 정치와 도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어느 순간에 정치적 해결을 넘어서 투쟁의 길을 택할 것인가? 그것을 누가 결정한단 말인가?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2012.01.16

인문학 | 정치와 도덕

김민철 | CIO KR
평소에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말들을 꼽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앞서 설명했던 형이상학은 물론이거니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같은 말들조차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이러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그래야 아는 척했다가 무식이 탄로나는 비극적 사태를 막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다루어 볼 것은 정치와 도덕이라는 개념이다(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개념’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란다. 쉽게 자가진단해볼 수 있는 방법은 그 말을 대신할 수 있는 어휘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 자리에 ‘어휘’, ‘단어’, ‘말’ 등이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개념’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자주 사용하는 이 두 가지 개념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말들이 주는 뉘앙스를 먼저 생각해 보자. ‘도덕’이라는 개념은 뭔가 멋져 보이면서도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느낌을 주는 반면, ‘정치’라는 개념은 어딘지 세련돼 보이면서도 진실하지 못한, 사기의 냄새가 풍기기도 한다. 이는 기회주의적인 철새 정치인들의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두 개념의 본질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초기 칼럼에서 설득하려면 사례를 들라고 강조한 바 있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알기 쉬운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대북 정책에 있어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로 민주당 정권과 김대중-노무현 정권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양자 가운데 어느 쪽이 남북관계에 대해 정치적 해결을 추구한 것일까?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표현한 것에 착안해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전자는 남북 관계를 선악의 틀 속에서 다루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남한과 미국은 선이며, 그 반대편에 있는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악이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 등의 틀 속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정치일까 아니면 도덕일까? 그것이 후자임은 이제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덕이 가치의 판단과 관련된 문제임도 이해 가능할 것이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6.15 공동 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상대방을 일단 악으로 규정해버리면 남은 것은 투쟁뿐이다. 선을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악을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악으로 지목된 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폭력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상대방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대화와 소통이 문제 해결의 방식이 될 것이다. 정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부시와 이명박 정권은 북한 정권의 붕괴를 목표로 삼는다. 절대악 그 자체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대화와 소통을 통한 평화와 공존을 목표로 한다. 정치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일방적인 목표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와 사이 공간에 대한 인정에 기반하여 합의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도덕과 정치를 단순화시켜 비교해 보면, 도덕은 전근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의 잔재이고, 정치는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명령이나 우주의 보편 원칙과 같은 개념에서 탈피한 근대의 정신은 바로 합의와 계약인 것이다. 그리고 합의와 계약의 기본 전제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 다시 말해서 다원성에 대한 인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문에서는 이른바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명시하고 있다. 남과 북 양 측이 현재 채택하고 있는 체제를 인정하고, 그 체제를 상호 인정하면서 교류를 확대해 나아가면서 평화와 공존을 공고히 하자는 것이다.

국회에서도 특정 정당이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대화나 합의 자체를 거부하고 시위를 벌이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정치가 실종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행태는 선악을 나누어 선을 실현하고 악을 근절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도덕’이라는 개념에서 다소 고리타분한 뉘앙스가 풍기는 것은 그 개념이 가진 전근대성 때문이다. 학생이나 자식의 의견을 묵살하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태도는 도덕적인 것이다. 자신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단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더불어 살아감의 가치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도덕적 태도를 버리고 오직 정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듯하다. 평화와 공존 이상의 가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정치’라는 개념에서 풍기는 부정적 인상은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을 대화와 합의로 풀어가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인가?

현재 우리는 안정된 민주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군부독재의 시퍼런 서슬 하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아련한 기억 속의 일이지만, 12시가 넘으면 밖에 나가지도 못 했고, 노래 가사가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송이 금지되었으며, 대머리인 연기자가 출연을 정지당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목숨을 바쳐 싸운 많은 민주 투사들과 그에 힘을 실어준 시민들의 투쟁 덕이다. 만약 그들이 자유로운 민주사회라는 이상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독재자들과 정치적인 타협을 추구했다면 어떨까? 더 거슬러올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에게 왜 정치적인 해결을 추구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까? 불의와 정치적 타협을 추구하는 자들은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이제 피상적이나마 정치와 도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어느 순간에 정치적 해결을 넘어서 투쟁의 길을 택할 것인가? 그것을 누가 결정한단 말인가?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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