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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종교, 형이상학, 그리고 따져 묻기

2011.11.14 김민철  |  CIO KR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신이 곧 말씀이다. 그는 말로 세상을 창조한다. 왜? 애초에 말밖에 없었으니까. 5일 동안 세상 모든 것을 말을 통해 만들어 낸 후(와, 입 아팠겠다^^), 6일째 되는 날은 드디어 사람을 만들게 된다(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연한 영화 <6번째 날>의 제목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먼저 자신의 형상을 본따 흙으로 남성을 만든다. 그리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내 여성을 만든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생명을 부여한다.

<성경>에서 천지창조를 묘사한 이 부분을 볼 때마다 의문을 금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사람도 그냥 말로 만들면 편할 텐데, 왜 굳이 흙으로 만들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태초에 말씀뿐이었고, 신은 곧 말씀이며, 그래서 말로 세상을 창조할 수밖에 없었다면, 인간은 어떻게 흙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먼저 말을 통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그리고 나서 손으로 흙을 빚었단 말인가? 그러면 그 형상은 무엇을 본땄는가? 그냥 만들어낸 것이라면 태초에 말씀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나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모두 무의미한 것 아닌가?”,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했다면, 다른 동식물이 가진 생명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질문을 던지자면 끝도 없다. 기독교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다른 부분을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죽여 희생으로 바치라는 신의 계시를 들었다. 외아들인 이삭을 모리아라는 곳으로 데려가서, 불태워 죽임으로써 희생의 의식을 하라는 것이다. 신앙심이 깊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데려다가, 나무로 제단을 쌓고, 칼을 뽑아 아들을 죽이고자 한다. 어떤 책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알프레드 히치콕도 이보다 오싹한 장면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행위를 중지시키고, 이삭 대신 희생용 양을 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데, 왜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하고자 했을까? 얼마나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그냥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무고한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그에 대해 의심을 품었어야 하지 않을까? 사탄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신학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은 나름의 설명을 하고자 하지만, 계속 따지고 든다면 그들은 결국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그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인간의 얕은 지혜로 신의 뜻을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가장 종교적인 대답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무신론자인 필자는 가끔 학생들에게 사이비 신자를 가리는 방법을 보여주곤 한다. “종교를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회 혹은 절에 왜 다니는가?”라는 간단한 물음으로 충분한 것이다. 여러분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대답할 지 생각해 보라.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천당 혹은 극락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면,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에게 종교란 내세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그 종교를 포기하고 개종하거나 혹은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고 합리적인 대답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자식의 수능 합격이나 남편의 승진을 위해 기도하는 종교인은 무속인이나 점집을 찾아가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진정한 종교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신의 영광을 위해서”다. 목숨을 바치는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들이 “인샬라”, 즉 “신의 뜻이라면”을 외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어쨌든 종교에서는 이 세상의 논리와 지혜를 초월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종교 경전은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이루어져 있고, 설교나 설법도 또한 말을 통한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초월할 수 있는가?”와 같은 난해한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즉각적으로 드는 한 가지 의문은 경전을 쓰거나 설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으며, 어떻게 그것을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독재자의 논리, 혹은 소수지배의 논리인 형이상학의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자신은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 검증할 수도 없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지만, 그에 대해 따져 물으면 자신과 같은 편의 다른 사람을 들먹인다. “성현이신 주자 선생에 따르면~”처럼 말이다. 결국 모든 형이상학은 종교적 믿음을 요구하며,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증언에 의한 정당화는 정당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지배되는 세계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것이기는 힘들다. 가끔 성인군자가 지배자의 자리에 올라 이른바 ‘태평성대'가 찾아왔다고도 기록돼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기는 지배 계층의 착취와 억압으로 점철돼 있을 뿐이었다. 중국의 어떤 왕은 자신의 뱃놀이를 위해 대륙을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하기도 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현의 도리를 내세우면서 반대파의 집권을 방지하기 위해 권모술수와 살육을 일삼았다. 모두 알다시피 서양 중세의 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형이상학적 진리라는 근거를 내세워 정당화됐지만, 그것이 사기 행각에 불과함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쉽게 입증 가능하다. 중세 교회의 면죄부 판매 행위는 신의 뜻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따져 묻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을 확인해 보라”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며, 사제들만이 그것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마찬가지다. 성인의 경전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뿐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가능했던 것이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중세 교회는 더 이상 사기를 못 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권위를 통째로 상실하게 된다. 성경이 번역되자, 신의 뜻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성경 어디에서 당신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있소?”라고 물을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이제 누구나 신과 성경을 통해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만민평등의 길이 열린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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