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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독재자의 논리

2011.09.16 김민철  |  CIO KR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결정적인 붕괴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현재는 초라하고 실패한 독재자의 전형으로 전락했지만, 그도 한때는 이슬람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리비아와 중동의 혁신을 추구한 개혁가였다. 27세에 왕정을 타파하는 혁명을 일으켰으며, 석유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여 영국과 미국 등의 일방적 석유시장 독점에 제재를 가하였을 뿐 아니라, 중동 지역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여 서구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그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말해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의 제재 때문이었다. 그가 추구한 반미(反美), 반유대 정책으로 인해 리비아는 미국에 의해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혀 경제봉쇄와 군사적 제재를 동시에 당해 왔다. 민주화 시위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사저에서 황금으로 된 소파가 발견되는 등 사치와 전횡을 일삼은 타락한 독재자의 모습만이 부각되지만, 이슬람의 시각에서 보면 영웅일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카다피가 계속해서 ‘순교자적 저항’을 외쳐온 것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생각하듯이 그것은 개인적인 탐욕에 대한 위장일 뿐이라고 비판한다면 어떨까? 그는 물론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해 “당신은 비열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카다피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대방을 비난하고 욕하는 행위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의 주장에 대한 논박은 될 수 없다.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할 때에는 잠정적으로나마 그가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자비의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카다피도 그러하겠지만, 거의 모든 독재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재자라는 오명을 무릅쓰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혔는가를 지적하곤 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독재자도 그에 대해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대중은 근시안적인 견지에서밖에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독재자의 주장은 결코 독자 여러분들이 코웃음 쳐 버리고 넘어갈 만한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플라톤의 철인왕 이론이 그와 정확히 동일한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동굴 속에 손발이 묶여 갇힌 채 세계의 실상을 모르는 죄수와 같다. 우리는 그저 동굴 밖의 빛에 의해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볼 뿐이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 사슬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가 세계의 실상을 보았다고 해 보자. 동굴 안에서 본 것들이 실상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깨닫고, 동굴 안의 동료들에게 연민을 느껴 동굴 안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실상을 알리고자 한다. 동굴 안 동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그의 말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계속 자신들의 무지를 지적하고 실상을 알리고자 한다면 그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했던 운명이었다. 또한 역사상 박해를 받아 온 많은 선각자들이 처했던 운명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선각자들은 탈선하려는 아들이나 학생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하는 부모나 선생의 입장에 처해 있는 셈이다. 흡연에 중독된 학생들에게 토론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흡연을 허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하다. 하지만 선각자의 입장에 선 선생은 그러한 결정을 수용할 수 없다. 성숙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는 학생들에게 흡연이란, 당장 눈앞의 욕구는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 전반을 놓고 보았을 때 장기적으로 커다란 피해가 될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선생은 매를 들어서라도 그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카다피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민들이 이른바 ‘민주화’에 대한 당장의 욕구를 자제하고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압박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이 리비아, 그리고 나아가 이슬람권의 주권을 사수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국 현대사에 연이어 등장한 독재자들의 논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요구를 잠시 억누르고 안정과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의 장구한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외치는 자들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들이다. 자신이 인권을 침해하고 전횡을 자행한 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권력자를 포함한 모든 독재자의 논리는 이것이다. 그들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에는 당연히 그들의 주장이 정당화된다. 하지만 만약 카다피처럼 실패한다면? 그들에게는 또 다른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자신들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다 죽어간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다를 바 없으며, 자신들을 올바로 평가해줄 것은 역사뿐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선각자의 사례를 인정한다면 이 역시 참으로 그럴싸한 논리 아닌가? 이제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독재자는 투쟁을 통해 타도해야지, 무슨 토론 따위가 필요하냐고 반문해서는 곤란하다. 타도를 위해서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 없는 투쟁은 또 다른 명분 없는 투쟁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가 바뀔 때면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는 언제나 고민에 휩싸이곤 했다. 명분 없이 혁명을 했다가는 자신이 선례가 되어 언제든지 또 자신과 같은 사람이 나와 뒤통수를 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세력뿐만 아니라 옹호 세력도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 중의 하나다. 명분이고 나발이고 힘으로 제압한 뒤 모든 반항을 진압하거나, 명분 싸움에서 이겨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독재를 비판하는 자가 첫 번째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 결국 그에게 남은 방법은 명분 싸움뿐이다.    

게다가 힘으로 독재를 타도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는 없다. 이상 사회의 건설도 힘으로 하고자 한다면, 독재를 무너뜨린 세력이 다시 독재를 하겠다는 것밖에 안 된다. 사상적 기반이 부족하면 소모품으로써 투사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건설적인 정책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독재자의 논리는 학교, 가정, 직장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소모적인 논쟁과 혼란에 염증을 느껴 과거의 ‘안정된’ 사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물론 앞서 말한 독재자의 논리에 상당 부분 공감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 중의 하나인가, 아니면 독재자의 논리를 격파할 지적 무기를 가지고 있는가?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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