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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블랙박스에 담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그림자

2014.04.15 김민철  |  CIO KR
며칠 전 주말 내가 사는 곳의 경찰서로부터 우편물을 한 통 받았다. ‘교통법규위반차량신고관련 사실확인요청서’라는 이름도 긴 이 우편물의 내용은 내 차가 교통법규를 위반하였다는 신고가 들어왔으니, 경찰서로 출석하여 사실 확인을 하든지, 아니면 위반 사실을 인정하고 가까운 경찰서나 파출소에 가서 과태료를 처분 받아 납부하라는 것이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과속 혹은 신호위반 감시 카메라에 찍히거나 혹은 경찰에 의해 위법 사실을 포착당하는 것은 운전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누군가가 나의 위법을 신고한다는 것은 쉽사리 경험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서류에 적힌 위반 일시와 장소를 보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시간에 내가 그곳을 지나간 것을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신고를 당할 만한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은 듯 했다.

나는 모범 운전자이다. 경찰로부터 이른바 ‘딱지’를 끊거나 과속 카메라에 찍힌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 정도로 몇 안 되는 그 경험도 기억조차 힘든 오래 전의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교통법규를 ‘칼 같이’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속도를 낼 곳에서는 적절하게 속도를 내어 규정 속도를 어기거나, 신호를 어겨야 할 곳에서는 때와 장소에 맞게 신호 위반을 하기도 한다.

법을 어기는 데 무슨 적절함이 있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모든 법을 지켜야 하는가는 결코 쉽지 않은 법철학의 근본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사는 곳과 같은 촌에서는 법을 지키는 것보다 어기는 것이 미덕인 경우가 심심치 않게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동네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좌회전을 하는 곳에서는 안전이 보장되는 한 신호를 위반하고서라도 빨리 좌회전을 함으로써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봐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나의 원칙은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 융통성 있게 행동하자는 것이다.

사실 현대인들의 도시 생활에 구석구석 침입해 있는 법의 역할을 전통사회에서는 관습과 도덕이 대신해 왔고, 전통적 생활양식을 가진 곳에서는 여전히 그러하다. 따라서 인구 밀도가 낮고, 공동체의 규모가 작은 집단일수록 법보다는 지역의 관습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법이 모든 구성원들의 생활 곳곳을 지배한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대형화되고 비면식화되어, 사람들의 갈등과 투쟁을 해결해 줄 궁극적인 장치가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대화 혹은 어르신들의 중재를 통해 쌍방이 조금씩 양보하여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법정이라는 탈인격화된 장소에서 해결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이는 결국 공동체적 유대가 붕괴되고,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개개인이 모래알과 같이 따로 노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법이 곧바로 정의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생각도 상당 부분 환상에 불과하다. 많은 경우 법정에서의 승리란 얼마나 비싸고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상속받고도 깜짝 놀랄 만큼 적은 상속세를 납부한 재벌 2세들이나, 국가와 사회에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히고도 무혐의나 가석방, 사면 등의 조치를 받아내곤 하는 대기업 총수들의 모습을 보면 법이 정의라는 생각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적절히 법을 어기는, 그러나 교통 위반 범칙금조차 언제 내 보았는지 기억조차 없는 나는 우편물에 적힌 위반 행위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위반 내용은 “제차 신호 조작 불이행”이라고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신호를 어겼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경찰을 비롯한 행정의 불친절함이 여전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주말을 보내고 나서 경찰서로 전화해 문의한 후 너무나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차선을 바꾸면서 방향 지시등, 즉 ‘깜빡이’를 켜지 않은 것을 뒤의 운전자가 신고했다는 것이다. 문의에 응하는 경찰도 당혹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법규를 어긴 것도 사실이고, 신고가 들어왔으니 처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신고자는 자신의 차에 장착된 블랙박스 내용을 증거물로 제출했으니, 출석하면 확인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은 안 나지만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내가 언제나 방향 지시등을 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교통의 상황을 감안해서 주변의 차량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방향지시등을 반드시 켠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시의적절한 융통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주변의 차량이나 보행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상황에서는 굳이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는다. 아마도 그 모습을 보고 불쾌해 한 어떤 준법 의식이 투철한 시민이 신고를 했나 보다.

나는 이 사건에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그림자를 보고 오싹해짐을 느꼈다. 언제 어디서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멋진 신세계’ 류의 세계가 실제로 도래했음을 실감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공권력에 의한 감시가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충격적이다. 공권력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감시자인 것이다. 구글글래스와 같은 첨단장비가 보급되면 될수록 그런 현실은 더욱 가속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들도 이제부터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범법자가 될 수 있다. 야간에 차가 드문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떠드는 행위, 지하철에서 옆자리의 여성을 야릇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하는 경우, 허물없는 동료나 친구, 친지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는 경우까지도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경범죄와 같이 애매한 범죄는 사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고, 내 사건을 담당한 경찰이 말한 대로 신고가 들어온 이상 공공기관에서는 처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메마르고 살벌한 세상을 가속화시키는 주범은 CCTV, 블랙박스, 구글글래스 등과 같은 첨단 기기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계는 결국 사람의 손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져, 작동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적 유대가 붕괴되고 그로 인한 상호 배려가 사라져왔으며, 그 간극을 메워 줄 학문과 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으로 그러한 기술이 우리를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열쇠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맞잡는 순간 그것은 축복이요, 그것을 말아 쥐고 서로를 겨냥하는 순간 그것은 재앙일 뿐인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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