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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자유의 마지막 조건

2014.07.15 김민철   |  CIO KR
처음 내 이름으로 출판한 번역서의 원저자이자, 유명한 철학자인 얼레스테어 매킨타이어는 “자유란 인간에게 너무나 고귀한 것이어서, 역사상의 어떤 사상가도 그것을 평가절하할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빠삐용>이나 <쇼생크 탈출>과 같은 영화가 성공한 이유도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인간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노력은 모두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들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빈곤 혹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것이고,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은 질병과 나약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것이며,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외로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것이고, 놀이를 즐기는 것은 권태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여러 가지 자유의 형태를 언급해 놓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통해, 그리고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최대한의 자유를 얻었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은 모든 중생이 겪어야 하는 네 가지 고통[生老病死]이라고 불렀다.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불교 신자들조차도 태어남이 왜 고통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보통 탄생은 긍정적이고 축하할 만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난해한 불교식 설명 말고, 이름 없는 한 철학자가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방식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면 그것을 축복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야 자식을 얻게 되었으니 축복할 만한 일이겠지만, 자식의 입장에서도 과연 그러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고대 이집트의 노예나 조선시대의 백정, 혹은 현대라 하더라도 소말리아와 같이 절대기아에 허덕이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도 축복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와 같은 곳에서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축복이라 할 만한 경우가 얼마나 될 지는 의문이다. 스스로가 성별을 선택할 수 없고, 부모의 재산이나 배움의 정도, 사는 지역 등도 선택할 수 없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 온 입장에서 보면, 십여 년 전 대치동에 사는 고등학교 2학년의 한 아이가 “전쟁이 난들 설마 지금만큼 불행하겠어요?”라고 한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비단 대치동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태어남을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는가 여부이다. 공수부대와 같은 특수부대에 들어가서 눈 위에서 자고 쥐나 뱀을 잡아 먹으면서 천리행군을 하더라도 본인이 그것을 원해서 했다면 자유를 침해당했노라고 할 수 없는 반면, 주위의 압박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재벌가의 사위나 며느리가 된다면 남들은 아무리 부러워하더라도 그것은 엄연한 자유의 침해요 불행일 것이다.

불교에서 인생의 대표적인 고통으로 생로병사를 언급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넷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탄생의 경우에도 운이 좋아 본인의 바람과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기 마련인데, 하물며 늙어감이나 병듦, 죽음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가진 최고의 소원일 것이다.


권력과 재력, 체력과 지적 능력, 그리고 미색에 이르기까지 일반 대중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넘칠 정도로 성취하고 소유했던 진시황의 일화는 늙고 병들어 죽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커다란지를 잘 보여준다. (현대적으로 다소 번안한)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이룬 진시황에게 딱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은 자신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이 위대한 존재가 자신이 보기에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들과 똑 같이 늙어 죽어가야 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신하 하나가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며, “그 길은 너무 멀어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듭니다. 노예 500명과 미동미녀(美童美女) 각 100명씩, 그리고 커다란 배 한 척과 노자 500억 원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시황은 그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도 그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잡아 오겠다는 사기꾼들에게 몇 차례고 유사한 요구를 들어주는 사기를 당하였다. 물론 그들도 돌아오지 않았고, 진시황은 결국 불로장생술의 일종인 단약을 복용하였다. 그런데 단약에 수은이 다량 들어있어, 결국에는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게 된다.

신하의 눈빛이나 표정만 보아도 그가 속이는 것이 있는지 여부까지 알아차렸다는 대단한 예지력의 소유자인 진시황이 바보나 할 만한 실수를, 그것도 몇 차례나 한 것이다. 생로병사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이 사람의 눈을 어디까지 멀게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로부터 인도의 수행자들은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요가라는 운동도 실은 그러한 수행의 일환이자 가장 기초에 속한다. 요기, 즉 요가 수행자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요기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TV에서 보여준 놀라운 유연성은 익히 아는 바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수행의 경지가 높아지면 자율 신경의 조절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내장의 위치를 스스로 바꾼다거나, 심장 박동의 속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 역시 자유를 위한 노력의 진일보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몸의 불수의근 역시 내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므로, 그것을 의지와 선택의 범위 내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만큼 자유의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궁극적 목적에 비하면 이러한 기적들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 다시 말해서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고타마 싯달타 역시 그러한 요가 수행에서 시작하여 자신만의 수행을 거쳐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부처가 된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자유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후의 불교 수행자들 역시 그의 뒤를 따르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과 생업을 포기하고 구도에 전념해야 하는 수행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중생의 눈으로 보기에 그들이 진정 생로병사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부처가 어떤 경지에서 어떻게 생사를 초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타마 싯달타의 육신을 가진 그 사람은 분명 죽었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전해지는 고승들도 예외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과 죽음에는 범인들의 그것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문둥병에 걸린 여인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경허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 선불교의 시조격인 경허는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는 여인에게 자신의 육신을 이른바 ‘보시’했다. 병에 대한 두려움은 초월한 것이다. 그를 포함한 고승들이 죽을 때를 알고 목욕재계한 후에 평온하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자 또한 지인(至人), 즉 깨달은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할 때 불구자를 자주 인용하곤 한다. 그런데 그들은 보통의 불구자들과 달리 자신들에게 다가온 불행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전쟁이나 질병 등 자신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생겨난 일은 운명인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질병과 늙음을 겪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것을 피하고자 발버둥친다고 해서 그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심적인 고통만 커질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유학에서는 이것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표현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만나게 되는 것은 운명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유학자의 길 가운데 하나인 것은 바로 이에서 기인한다. 유학자들이 가난을 반긴다는 일각의 믿음은 커다란 오해이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강도질이나 사기, 혹은 매국노 짓을 통해서는 원하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을 운명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숙명론자라는 비판은 가당치 않다.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미리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최선을 다한 후에야 올바른 운명[正命], 즉 진정한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과 올바른 식습관, 적절한 운동 등의 노력을 했음에도 유전적인 요인으로 질병에 걸리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 난잡한 생활의 결과로 생긴 질병을 운명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역시 최선을 다한 삶 이후에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이르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그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유불도 모두가 추천하는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유의 마지막 조건은 너무나도 수동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체념과 다를 게 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이후의 결과에 대한 수용은 체념하는 자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며, 주체의 마음 자세는 더더욱 다를 수밖에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그것이야말로 자유의 마지막 조건인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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