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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 IDG 창립자 패트릭 맥거번의 삶과 성공에서 배우는 리더십 <퓨처 포워드>

2018.10.18 Glenn Rifkin  |  Computerworld

50년 전, 컴퓨터 시대의 동이 막 터올 무렵, 패트릭 J. 맥거번은 IDC(International Data Corp.,)를 창립한 후 그는 IDG(International Data Group)를 설립했다(그리고 IDG는 그가 1967년 시작한 Computerworld의 모회사이기도 하다). 이후 맥거번은 2014년 타계할 때까지 글로벌 출판 및 데이터 제국을 만들어나갔다.

그가 일궈낸 제국은 오늘날 전 세계 97개 국가에 300개 이상의 매체를 가지고 있으며 460개의 웹사이트와 오늘날 IT산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루는 700가지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지난 2000년에는 MIT와 협력하여 맥거번 뇌 연구 협회(McGovern Institute for Brain Research)를 설립하기도 했다.

글렌 리프킨은 자신의 새로운 저서 <퓨처 포워드: 세계적 테크놀로지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패트릭 맥거번을 통해 배우는 진정한 리더십(Future Forward: Leadership Lessons from Patrick McGovern, the Visionary Who Circled the Globe and Built a Technology Media Empire)>에서 맥거번의 일생과 그가 보여준 리더십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에는 맥거번이 어떻게 1964년 IDC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Computerworld의 탄생으로 이어진 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당시 그는 매사추세츠에 근거지를 둔 매거진 ‘컴퓨터 앤 오토메이션(Computers and Automation)’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제 막 신생 IT 산업에 대해 알아가던 중이었다.)


 패트릭 맥거번

인터내셔널 데이터 코퍼레이션의 시작
모든 것은 1964년 2월의 어느 추운 날 뉴욕으로의 여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맥거번은 RCA 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맨해튼 행 아침 열차를 탔다. 오후에는 유니박(Univac) CEO 루 레이더와의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다.

RCA는 막 새로운 마그네틱 카드 메모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이를 여기저기 소개하던 참이었는데, 맥거번은 이것이 너무 진부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6개월 전 이미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제품을 공개한 바 있었고, RCA의 판매량은 저조했다. RCA는 왜 남이 이미 간 길을 가려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RCA 엔지니어들에게 새로운 메모리 시스템의 실사용에 관해 묻자 그들은 “솔직히, 실사용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단지 꽤 똑똑한 RAM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만들어 본 거예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시장에 제품을 던져 놓고 누가 와서 미끼를 물어주기를 기다린다는 말이지? 아직은 컴퓨터 산업이 초기이던 시절이지만, 당시 맥거번의 눈에도 이러한 전략은 조금 난감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날 오후, 레이더를 만난 맥거번은 왜 그토록 많은 기업이 R&D에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도 시장에 수요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한 제품을 만드는지를 물어보았다.

레이더는 그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바로 보셨습니다. 나도 그 점이 무척 염려됩니다. 이토록 많은 돈이 시장의 지도 없이 마구잡이로 지출되고 있다는 현실 말입니다. 우리는 고객이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 사람들인지조차 모르고 있어요. 결국 기업들이 각자의 영업 인력을 투입하여 이를 알아내려고 하는 실정인데, 이런 노력은 효과가 제한적입니다”라면서, “컴퓨터가 어디에 설치되어 있고, 설정 환경은 어떤지, 미래에 사용자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주변 기기를 원하는지 등의 정보를 담은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텐데요”라고 덧붙였다.

맥거번 역시 여기에 흥미가 생겼다. 실제로 그는 설치된 컴퓨터 수를 모델별로 정리한 결과 기업 및 학술기관들에 약 1만 대 가량의 기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큰 그림’에 속하는 이런 정보가 있다면 잡지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는 레이더에게 “제가 컴퓨터 기기를 사용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기관들에 설문지를 돌려 컴퓨터 기기 설치 현황, 설치 환경, 그리고 주문 양 등을 알아보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다. 레이더는 무척 반가워하며 “바로 그거예요! 우리가 필요로 하던 게. 수고료는 얼마쯤 드리면 될까요?”라고 물어왔다.

당시만 해도 이런 개념 자체가 잘 없던 시기라 비교할 대상이 없었던 맥거번은 그냥 머릿속에 생각나는 숫자를 불렀다고 한다. “1만 5,000달러요.” 레이더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오!”

맥거번은 얼른 머리를 돌려 이렇게 답했다. “우리 회사가 고등학교 근처에 있어요. 똑똑한 학생들 몇 명을 채용해서 데이터 입력 같은 단순 작업을 위임하면 아마도 1만 2,000달러 선으로도 비용을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레이더는 그가 앉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아뇨, 아뇨,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렇게 싼값에 일을 맡았다가는 선생님이 제공하는 정보를 누구도 믿지 않을 거예요. 데이터의 품질도 안정성도 의심할 거란 말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를 부르셔야 합니다. 아마 그의 2배 정도를 부르면 그때는 다들 당신이 제공하는 정보를 믿고 사용하려 할 거요. 3만 달러를 불러야 다들 전문가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맥거번은 당황했다. “아니, 값이 비싸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러자 레이더는 “물론이죠!”라고 답했다. 맥거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레이더는 “그 데이터를 나한테만 팔지 말고, 다른 컴퓨터 회사들에게 가져가 봐요. 그쪽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보완, 강화할 수 있는 많은 리소스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의 데이터는 시장의 미래 수요를 파악할 자료가 될 거요”라고 조언했다.

맥거번은 들뜬 마음을 안고 보스턴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펜 역으로 향했다. “가격이 비쌀수록 더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지? 정말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닐 수 없군”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열차에 오르기 전, 그는 잡지사의 에드 버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버클리에게 데이터베이스 개념을 설명하고 “이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버클리는 두 번 생각 하지도 않고 그 아이디어를 거절했다. “우리는 연구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뭐, 맥거번 씨 혼자서 취미로 해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혼자서 진행하고 리스크도 혼자 지도록 하세요.”

대부분의 젊은 저널리스트들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작업을 혼자 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데이터베이스의 필요를 절실히 느껴 온 맥거번은 도저히 이 아이디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보스턴 행 열차 안에서 그는 간단한 프로젝트 제안서와 함께 기업들에게 보낸 설문지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원래부터 실용주의자였던 그는 인덱스카드를 꺼내 이름에 들어갈 만한 단어들을 하나씩 적어 보기 시작했다. ‘데이터,’ ‘전국,’ ‘컴퓨터,’ ‘시스템’ 등이 그것이었다. 그는 카드를 마구잡이로 섞은 뒤 3장을 랜덤으로 뽑았다. 그가 뽑은 3단어는 ‘국제(international)’ ‘데이터(data)’ 그리고 ‘기업(corporation)’ 이었다. 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 IDC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IDC의 사업 범위는 매사추세츠주 뉴튼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 사실이 맥거번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향후 시장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프로젝트가 어떤 쪽으로든 방향을 바꿀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일반적이며 특정적이지 않은 이름이 필요했다. 내가 뽑은 이름은 거기에 잘 부합했다”고 그는 훗날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하버드 법대에 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도 IDC라는 상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을 재차 확인한 맥거번은 제안서에 IDC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주말 동안 문서화했다. 월요일에 그는 약 20여 개 기업에 제안서를 보내며 “아마 한 곳이나 답신을 주면 다행이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2주일 뒤 그는 깜짝 놀라게 된다. 무려 여덟 곳의 회사가 선불로 총 8만 달러 수표를 보내 왔다. 그가 요구한 3만 달러 중 1/3을 선불금으로 지급한 것이다. 당시 그의 월급이 한 달에 60달러였으니 8만 달러라는 돈은 “현실감이 없는 액수”였다.

한 번도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없었던 맥거번은 엄청난 액수의 현금이 수중에 들어오자 얼른 은행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은행원은 그를 제지하며 “수령자 이름이 회사로 되어 있네요. 이사회의 승인이 있어야 우리 은행에 계좌를 만들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저 ‘이러면 좋지 않을까’ 정도로 시작했던 것이 하루아침에 본격적인 사업이 되게 된 셈이었다. 그는 법대에 있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벤처를 법인화했다.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투자를 부탁하고 이사회 자리를 제안했지만 실제로 그를 믿고 선뜻 투자해 준 것은 그의 누이인 로레트와 연구 조교이자 미래의 부인이 될 수잔 사익스 뿐이었다(둘은 1964년 9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각각 10달러를 투자해 맥거번과 함께 이사회 멤버가 되었다.

그는 회사를 등록하고, 고객사들에게 받은 선불금을 은행에 예치한 뒤, 사업을 시작할 기초 자금이 필요하다고 여겨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5,000달러에 팔았다. 당시 자신을 믿고 누이와 아내가 선뜻 내놓은, 적지 않은 돈인 10달러가 훗날 수백만 달러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맥거번은 항상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맥거번의 신생 기업이 워낙 빠르게 수익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차를 팔아 받은 5,000달러는 쓸 필요도 없었다.

“그 5,000달러는 아직도 은행에 있습니다. 매달 약간의 이자도 나오죠. 그날 이후 거기에 기초 자본으로 단 1달러도 더 추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수십 년 뒤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창업 신화를 기대하는 이들은 맥거번이 자신의 사업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다니던 회사를 그날로 그만두었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맥거번은 컴퓨터 앤 오토메이션(Computer & Automation)에 3년 이상 더 머물며 에디터 일과 새로운 사업을 병행해 나갔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이상 예전만큼 에디터 일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었고, 1967년이 되어서는 IDC 사업을 파트 타임으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거번은 이미 아주 귀중한 사업 교훈을 배운 뒤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고 거기에 적절히 대응한다면 실패할 수 없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시장에 이를 강요하려 한다면, 실패의 위험은 커진다. 1967년, 컴퓨터 산업은 여러 가지 전조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점점 더 컴퓨터를 사용하는 기업들이 빠른 숫자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미니컴퓨터라는 이름의 더 작고, 싸고, 강력한 시스템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 분야가 생겨나면서 최종 사용자들의 손에 컴퓨터 기술을 쥐어 주고 있었다. 이처럼 컴퓨터의 사용이 각계각층으로 불길처럼 번져가고, 똑똑하고 재능 있는 젊은 기업가들이 실리콘밸리와 보스턴으로 몰려들면서, 컴퓨터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데이터와 비즈니스 통찰력에 대한 요구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해서 솟아났다. 패트릭 맥거번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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