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30

블로그 | 리눅스는 어떻게 슈퍼컴퓨팅을 장악했나

Andy Patrizio | Network World
수년간의 노력 끝에 리눅스가 마침내 해냈다. 리눅스는 이제 톱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에서 구동되며, 톱 500 이외의 슈퍼컴퓨터에서는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톱 500 슈퍼컴퓨터의 92%를 장악한 인텔 칩보다 더 놀라운 성과다.

그렇다면 리눅스는 어떻게 현재와 같은 지배력을 갖게 됐을까? 어떻게 26살 핀란드 청년이 만든 운영체제가 벨 연구소가 만들고 IBM이나 썬, HP 같은 거대 업체가 지원한 유닉스를 누르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기타 수많은 유닉스 파생 버전을 이길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리눅스에 완전히 유리하게 맞춰졌다. 초보자에게 유닉스는 파편화되어 있고 특정 업체의 프로세서와 연결되어 있었다. AT&T와 벨 연구소는 유닉스 시스템 V를 장비업체에 라이선스하고 업체는 이를 자사의 취향에 맞게 만들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솔라리스를 만들었고, IBM은 AIX를, HP는 HP-UX를, SGI는 IRIX를 만들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호환되지 않았고, 기껏해야 운이 좋으면 다시 컴파일해야 하는 포팅 정도가 가능했다.

하이페리온 리서치의 리서치 담당 부사장 스티브 콘웨이는 “유닉스가 없었다면 리눅스도 없었을 것”이라며, “유닉스 시대는 리눅스 시대에 굴복했는데, 리눅스가 더 개방적이고 업체 중심적이지 않아서이다. 그 덕분에 리눅스가 모든 커뮤니티가 하나의 중심 버전이 있는 운영체제를 얻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주요 유닉스 중 어느 곳도 x86 아키텍처를 지원하지 않았다. 썬이 SunOS를 내놓았지만, 텍스트 기반 운영체제였다. x86용 솔라리스도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밀어준 적이 없다. 다른 모든 유닉스는 전용 RISC 프로세서에서만 동작했으며, 그 어느 업체도 서버 시장에서 x86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리눅스 이전에 제대로 지원되는 x86 유닉스라고는 SCO(Santa Cruz Operation)의 제닉스(Xenix)와 버클리대학의 FreeBSD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제닉스도 데스크톱 운영체제였을 뿐 서버 운영체제는 아니었다. 2001년 SCO는 칼데라 시스템에 매각됐고, 이미 리눅스가 추진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다. 윈도우 NT 4.0부터 클러스터링 소프트웨어를 갖추고 나왔지만, 제대로 된 노력은 2006년 윈도우 컴퓨트 클러스터 서버 2003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이 분야에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으며, 2010년 이후로는 클러스터링 기술의 일부를 표준 서버 에디션에 포함시켜 버렸다.

콘웨이는 “마이크로소프트로서는 2년 정도 HPC에 초점을 맞췄지만,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는 않았다”라며, “마이크로소프트만이 아니다. 당시로써는 HPC 시장이 지금처럼 커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대부분 클러스터 이전 시대였다. 90년대까지 HPC 시장은 모든 것을 통틀어 20억 달러 규모였다. 지난 해는 220억 달러였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HPC가 지금처럼 부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주인공은 우주 탐사가 본업인 NASA다. 1990년대 중반, 일군의 프로그래머가 x86 기반 서버를 클러스터링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처리 성능을 모아 당시에는 너무 비싸고 독점적이었던 HPC 시스템의 저렴한 대안을 만든 것이다. 베오울프(Beowulf)란 이름의 이 기술은 특정 운영체제에 묶여 있지도 않았고, 어떤 오픈소스 운영체제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발명가는 리눅스를 선택했고, 이를 기점으로 리눅스는 HPC 분야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콘웨이는 “리눅스가 다른 운영체제보다 힘을 받게 된 진짜 이유는 2000년 즈음에 클러스터가 본격화된 것이다”라며, “그 시점에 클러스터가 HPC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했으며, 리눅스를 포함해 범용적인 기술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이후 10년 동안 HPC 시장은 연평균 2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베오울프는 FreeBSD도 지원했는데, 왜 크지 못했을까? 콘웨이는 FreeBSD를 아이디어는 매우 뛰어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시장에서 자리 잡지 못한 기술 중의 하나로 평가했다.

리눅스에는 FreeBSD에는 없는 강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리누스 토발즈이다. 토발즈는 거칠고 엄격한 리더이. 너무 거칠다는 평가도 많다. 불쾌한 표현도 서슴치 않고 해서 스티브 잡스에게 모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리눅스에 필요한 리더였다.

마지막 조각은 솔루션 업체의 지원이다. FreeBSD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리눅스는 잘 조직된 기업들이 배경에 있다. 필자의 기억에 1993년 미국 하트포드에서 열린 컴퓨터 행사에서 밥 영이 레드햇 리눅스의 극초기 버전을 CD-ROM에 담아 팔고 있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레드햇은 출범과 함께 UC 버클리가 FreeBSD로는 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리눅스를 이끌었다. 칼데라, 수세, 캐노니컬이 등장했다. 그리고 1999년 마침내 IBM이 리눅스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 시점에서 유닉스는 이미 산 송장 신세가 된 것이다.

리눅스와 리누스 토발즈가 혼자서 현재에 이른 것은 아니다. AT&T/벨 연구소, 데니스 리치, 켄 톰슨, 키스 보스틱, 리처드 스톨만, 썬, HP, IBM, SGI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과 업체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뚝 섰다.  editor@itworld.co.kr



2017.11.30

블로그 | 리눅스는 어떻게 슈퍼컴퓨팅을 장악했나

Andy Patrizio | Network World
수년간의 노력 끝에 리눅스가 마침내 해냈다. 리눅스는 이제 톱 500 목록에 오른 모든 슈퍼컴퓨터에서 구동되며, 톱 500 이외의 슈퍼컴퓨터에서는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톱 500 슈퍼컴퓨터의 92%를 장악한 인텔 칩보다 더 놀라운 성과다.

그렇다면 리눅스는 어떻게 현재와 같은 지배력을 갖게 됐을까? 어떻게 26살 핀란드 청년이 만든 운영체제가 벨 연구소가 만들고 IBM이나 썬, HP 같은 거대 업체가 지원한 유닉스를 누르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기타 수많은 유닉스 파생 버전을 이길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리눅스에 완전히 유리하게 맞춰졌다. 초보자에게 유닉스는 파편화되어 있고 특정 업체의 프로세서와 연결되어 있었다. AT&T와 벨 연구소는 유닉스 시스템 V를 장비업체에 라이선스하고 업체는 이를 자사의 취향에 맞게 만들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솔라리스를 만들었고, IBM은 AIX를, HP는 HP-UX를, SGI는 IRIX를 만들었다. 이들 중 어느 것도 호환되지 않았고, 기껏해야 운이 좋으면 다시 컴파일해야 하는 포팅 정도가 가능했다.

하이페리온 리서치의 리서치 담당 부사장 스티브 콘웨이는 “유닉스가 없었다면 리눅스도 없었을 것”이라며, “유닉스 시대는 리눅스 시대에 굴복했는데, 리눅스가 더 개방적이고 업체 중심적이지 않아서이다. 그 덕분에 리눅스가 모든 커뮤니티가 하나의 중심 버전이 있는 운영체제를 얻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주요 유닉스 중 어느 곳도 x86 아키텍처를 지원하지 않았다. 썬이 SunOS를 내놓았지만, 텍스트 기반 운영체제였다. x86용 솔라리스도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밀어준 적이 없다. 다른 모든 유닉스는 전용 RISC 프로세서에서만 동작했으며, 그 어느 업체도 서버 시장에서 x86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리눅스 이전에 제대로 지원되는 x86 유닉스라고는 SCO(Santa Cruz Operation)의 제닉스(Xenix)와 버클리대학의 FreeBSD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제닉스도 데스크톱 운영체제였을 뿐 서버 운영체제는 아니었다. 2001년 SCO는 칼데라 시스템에 매각됐고, 이미 리눅스가 추진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기회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있다. 윈도우 NT 4.0부터 클러스터링 소프트웨어를 갖추고 나왔지만, 제대로 된 노력은 2006년 윈도우 컴퓨트 클러스터 서버 2003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이 분야에 그렇게 큰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으며, 2010년 이후로는 클러스터링 기술의 일부를 표준 서버 에디션에 포함시켜 버렸다.

콘웨이는 “마이크로소프트로서는 2년 정도 HPC에 초점을 맞췄지만,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는 않았다”라며, “마이크로소프트만이 아니다. 당시로써는 HPC 시장이 지금처럼 커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대부분 클러스터 이전 시대였다. 90년대까지 HPC 시장은 모든 것을 통틀어 20억 달러 규모였다. 지난 해는 220억 달러였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HPC가 지금처럼 부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주인공은 우주 탐사가 본업인 NASA다. 1990년대 중반, 일군의 프로그래머가 x86 기반 서버를 클러스터링하는 방법을 만들었다. 처리 성능을 모아 당시에는 너무 비싸고 독점적이었던 HPC 시스템의 저렴한 대안을 만든 것이다. 베오울프(Beowulf)란 이름의 이 기술은 특정 운영체제에 묶여 있지도 않았고, 어떤 오픈소스 운영체제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발명가는 리눅스를 선택했고, 이를 기점으로 리눅스는 HPC 분야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콘웨이는 “리눅스가 다른 운영체제보다 힘을 받게 된 진짜 이유는 2000년 즈음에 클러스터가 본격화된 것이다”라며, “그 시점에 클러스터가 HPC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했으며, 리눅스를 포함해 범용적인 기술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이후 10년 동안 HPC 시장은 연평균 2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베오울프는 FreeBSD도 지원했는데, 왜 크지 못했을까? 콘웨이는 FreeBSD를 아이디어는 매우 뛰어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시장에서 자리 잡지 못한 기술 중의 하나로 평가했다.

리눅스에는 FreeBSD에는 없는 강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리누스 토발즈이다. 토발즈는 거칠고 엄격한 리더이. 너무 거칠다는 평가도 많다. 불쾌한 표현도 서슴치 않고 해서 스티브 잡스에게 모욕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리눅스에 필요한 리더였다.

마지막 조각은 솔루션 업체의 지원이다. FreeBSD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리눅스는 잘 조직된 기업들이 배경에 있다. 필자의 기억에 1993년 미국 하트포드에서 열린 컴퓨터 행사에서 밥 영이 레드햇 리눅스의 극초기 버전을 CD-ROM에 담아 팔고 있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레드햇은 출범과 함께 UC 버클리가 FreeBSD로는 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리눅스를 이끌었다. 칼데라, 수세, 캐노니컬이 등장했다. 그리고 1999년 마침내 IBM이 리눅스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 시점에서 유닉스는 이미 산 송장 신세가 된 것이다.

리눅스와 리누스 토발즈가 혼자서 현재에 이른 것은 아니다. AT&T/벨 연구소, 데니스 리치, 켄 톰슨, 키스 보스틱, 리처드 스톨만, 썬, HP, IBM, SGI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과 업체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진정으로 우뚝 섰다.  editor@it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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