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11

박준영 칼럼 | 기술과 인문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가?

박준영 | CIO KR
안녕하세요? 첫 칼럼으로 인사드리는 문화인류학자 박준영입니다. 저는 공학을 전공하고 IT제조업회사에서 10년간 연구원과 인사담당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기술과 인문이 만나는 장면을 말과 글로 전달하는 일을 합니다.

알파고가 머신러닝으로 이세돌을 이기고 세계랭킹 1위 커제를 울렸습니다. 저는 승패의 여부보다는 알파고는 언제쯤 커제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세돌에게 덕담을 해줄까 궁금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인공지능은 진짜 인간과 구별되지 않겠죠. 물론 이세돌이 가냘픈 목소리로 패배를 인정할 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스무 살 청년이 모든 것을 잃은 듯 슬퍼할 때 같이 울어주는 건 알파고 밖의 일입니다.

알파고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그렇게 음성인식 서비스 시리(Siri)에 목을 매달았던 이유는 목소리 톤으로 감정을 분석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 톤일 때 지갑이 열리는가를 판단하고 싶었다는 말이죠. 구글이 무인자동차에 매달리는 이유도 운전할 시간도 인터넷에 접속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들립니다.

알파고를 중심으로 하는 인공지능도 기술이지만 자연물인 돌을 쪼개서 뗀석기를 만든 것도 기술입니다. 그에 앞서 정령 숭배 신앙도 죽음의 위협을 견디는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인당수에 뛰어든 효녀 심청 같이 약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례도 지금은 비과학이지만 그때만 해도 참 설득력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파고와 제물의례의 차이는 과학과 비과학, 기술의 난이도 문제이지만 저는 둘의 구분을 되돌릴 수 있는가 없는가로 나눠보고자 합니다. 심청이는 우주 탄생 150억년에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아비의 개안시키겠다고 물에 빠지는 시도는 단 한 번입니다. 성공과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심청의 죽음은 오직 한번입니다. 초기 기술은 이렇게 인간을 해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내포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에서는 되돌리기가, 수정과 보완, 복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인간의 목숨을 담보한 위험한 수술 전에 무한히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똥배가 나와도 사진 보정 프로그램으로 몸짱 비슷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심청전은 마당놀이를 넘어 영상물로 만들어져서 세계 도처에서 수 많은 심청이의 죽음을 무한반복으로 목도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그래서 두 방향입니다.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죽음과 같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했지만 영상으로만 보는 반복된 죽음의 목격은 죽음의 숭고함을 삭제시키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준다고도 하지만 직업을 잃고 배고픔에 강제로 자유인이 됩니다. 자유는 노동 해방이면서도 무일푼을 야기합니다. 기술은 과연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질문에 앞서서 그 자유는 얼마나 다양한 장면을 지녔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문은 사람의 무늬라고도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온 결이기도 하지요. 저는 인문을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도 기술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가졌습니다. 프로포즈를 할 때 ‘사랑해’는 마음을 다했으니 내 제안을 받아달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던 연인이 어느덧 익숙한 통화를 하던 중 ‘이따 전화할게, 사랑해’라는 말은 전화를 이만 끊겠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신은 역사 속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서구의 신을 통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계몽하겠다는 의지는 서구의 신학과 과학의 틀에 전 지구를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수 많은 학살과 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행동 근원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기술이 자유를, 인문이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개선되거나 혹은 풍요로워진다고 쉽게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서 한 인간이 한 인간으로 대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궁리할 수 밖에 없겠지요. 역사적 사건이나 혹은 오늘 스치는 숨결, 그 순간을 포착하려는 것이 이 칼럼의 작은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문화인류학자 박준영씨는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연구원, 인사팀 과장으로 근무하고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연세대학교 공학, 경제학석사를 졸업하고 문화학/인류학 박사과정 중이다. 기술과 인문, 예술이 만나는 장면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관련 강의와 저술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walker80/)를 운영 중이다. ciokr@idg.co.kr 

2017.07.11

박준영 칼럼 | 기술과 인문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가?

박준영 | CIO KR
안녕하세요? 첫 칼럼으로 인사드리는 문화인류학자 박준영입니다. 저는 공학을 전공하고 IT제조업회사에서 10년간 연구원과 인사담당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기술과 인문이 만나는 장면을 말과 글로 전달하는 일을 합니다.

알파고가 머신러닝으로 이세돌을 이기고 세계랭킹 1위 커제를 울렸습니다. 저는 승패의 여부보다는 알파고는 언제쯤 커제의 눈물을 닦아주고 이세돌에게 덕담을 해줄까 궁금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인공지능은 진짜 인간과 구별되지 않겠죠. 물론 이세돌이 가냘픈 목소리로 패배를 인정할 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스무 살 청년이 모든 것을 잃은 듯 슬퍼할 때 같이 울어주는 건 알파고 밖의 일입니다.

알파고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그렇게 음성인식 서비스 시리(Siri)에 목을 매달았던 이유는 목소리 톤으로 감정을 분석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 톤일 때 지갑이 열리는가를 판단하고 싶었다는 말이죠. 구글이 무인자동차에 매달리는 이유도 운전할 시간도 인터넷에 접속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들립니다.

알파고를 중심으로 하는 인공지능도 기술이지만 자연물인 돌을 쪼개서 뗀석기를 만든 것도 기술입니다. 그에 앞서 정령 숭배 신앙도 죽음의 위협을 견디는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인당수에 뛰어든 효녀 심청 같이 약자를 제물로 바치는 의례도 지금은 비과학이지만 그때만 해도 참 설득력 있는 기술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파고와 제물의례의 차이는 과학과 비과학, 기술의 난이도 문제이지만 저는 둘의 구분을 되돌릴 수 있는가 없는가로 나눠보고자 합니다. 심청이는 우주 탄생 150억년에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아비의 개안시키겠다고 물에 빠지는 시도는 단 한 번입니다. 성공과 실패 여부에 관계없이 심청의 죽음은 오직 한번입니다. 초기 기술은 이렇게 인간을 해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내포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에서는 되돌리기가, 수정과 보완, 복제가 가능해졌습니다. 인간의 목숨을 담보한 위험한 수술 전에 무한히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똥배가 나와도 사진 보정 프로그램으로 몸짱 비슷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심청전은 마당놀이를 넘어 영상물로 만들어져서 세계 도처에서 수 많은 심청이의 죽음을 무한반복으로 목도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그래서 두 방향입니다.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죽음과 같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했지만 영상으로만 보는 반복된 죽음의 목격은 죽음의 숭고함을 삭제시키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준다고도 하지만 직업을 잃고 배고픔에 강제로 자유인이 됩니다. 자유는 노동 해방이면서도 무일푼을 야기합니다. 기술은 과연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질문에 앞서서 그 자유는 얼마나 다양한 장면을 지녔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문은 사람의 무늬라고도 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온 결이기도 하지요. 저는 인문을 사랑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도 기술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가졌습니다. 프로포즈를 할 때 ‘사랑해’는 마음을 다했으니 내 제안을 받아달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던 연인이 어느덧 익숙한 통화를 하던 중 ‘이따 전화할게, 사랑해’라는 말은 전화를 이만 끊겠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신은 역사 속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서구의 신을 통해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계몽하겠다는 의지는 서구의 신학과 과학의 틀에 전 지구를 고정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수 많은 학살과 큰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행동 근원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기술이 자유를, 인문이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개선되거나 혹은 풍요로워진다고 쉽게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어느 지점에서 한 인간이 한 인간으로 대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궁리할 수 밖에 없겠지요. 역사적 사건이나 혹은 오늘 스치는 숨결, 그 순간을 포착하려는 것이 이 칼럼의 작은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문화인류학자 박준영씨는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연구원, 인사팀 과장으로 근무하고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연세대학교 공학, 경제학석사를 졸업하고 문화학/인류학 박사과정 중이다. 기술과 인문, 예술이 만나는 장면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관련 강의와 저술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walker80/)를 운영 중이다. ciokr@idg.co.kr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