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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교양

인문학 | 유물론과 복지국가

2013.02.15 김민철  |  CIO KR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지배한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분단과 극단적 이념적 대결구도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산주의라면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마르크스로 인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는가를 알게 된다면 세계와 인간의 역사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사실 학문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보다 중요한 경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건물을 짓더라도 기초가 건물 자체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며, 운동을 할 때에도 하체의 안정성이 운동 능력 전반을 결정짓는다. 이런 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니겠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에 적용한 것이다.

이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우리 속담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한 달 용돈으로 5천만 원쯤 쓰는 친구에게 특급호텔 뷔페를 한 번 사달라고 한다면 그는 별 고민 없이 사줄 수 있겠지만, 한 달 용돈이 20만 원에 불과한 친구에게 동일한 부탁을 한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결정을 그들 인간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성급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러한 행동의 차이를 낳은 것뿐이다. 

이는 개인적 성격이나 행동 양식뿐 아니라, 종교와 같은 사회적 요소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이른바 고려장이라는 장례 양식은 식량의 절대부족 상황에서 집단의 존속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난 것이다.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하는 것은 척박한 생산 환경에 기인한다. 단기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소를 잡아먹을 경우 장기적인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인간성의 모든 요소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 제도 및 문화 전반까지도 물질적 환경과 여건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적 특징 또한 물질적 환경 가운데 하나임을 감안한다면, 정신적 활동과 그 산물 모두는 물질적인 것의 부산물이며,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뿐이며, 인간의 정신적 영역은 모두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속성으로 환원 가능하다. 마르크시즘은 이렇게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평등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게 된다. 개개인의 능력은 정당한 자신의 몫이라 할 수 없다. 부모로부터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는지 혹은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게 되는지 여부는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마르크스는 “노동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하되, 분배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가족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가족 구성원은 능력에 따라 차등적인 대우를 받지 않는다. 가장이 혼자 돈을 벌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렇지 못해도, 가장이 번 돈을 모든 구성원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 능력이 있는 구성원은 가족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의 필요를 최소화하기도 한다. 과거부터 부모들은 자신이 먹을 것은 못 먹더라도, 자식들은 배불리 먹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최근에는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고, 교복처럼 되어 있는 노스페이스 파카를 사 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기도 한다. 가족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만큼 일하고, 그 결과물을 구성원 전체가 필요에 따라 공유하는 이상적 사회의 축소판인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자신에 비해 무능하다는 이유로 가장이 아이들이나 노부모 혹은 장애를 가진 형제를 핍박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면 당연히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난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를 가족이 확장된 형태로 본다면, 고아나 독거노인, 장애인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방치되는 상황 역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타고난 능력만으로는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며, 성취에는 개인의 노력이 필수적이라며 유물론을 반박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유물론 혹은 환원주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환원주의에 그렇게 노력하려는 의지나 성향 역시 물질적 혹은 생물학적 속성으로 환원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론 혹은 환원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사회 전반에 걸쳐 평등에 대한 요구가 드세질 수밖에 없다. 내가 가난한 것도, 다른 어떤 사람이 부유한 것도 모두 우연적인 요소의 결과물일 뿐이다. 부자들이 자기 재산에 대해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가난한 사람을 무능력하고 나태하다고 비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아가 자신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턱없이 부족한 급여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는 가족을 학대하는 악덕 가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범죄와 처벌에 대한 견해도 근본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에는 범죄자를 사악한 영혼의 소유자 혹은 나태한 의지 나약자로 치부했지만, 이제 그는 불운을 타고난 사람으로 여겨진다. 사회에서 영구히 추방하기보다는, 바람직한 환경을 제공하거나 적절한 치료를 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응보론보다는 교화론이 득세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영역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물질적 환경의 부산물인지 하는 것은 여전히 증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게다가 유물론이나 환원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인간은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환경의 함수관계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함수관계는 끊임없이 연속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성 자체가 소멸되는 숙명론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적 세계관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제 인간이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최소한 상당부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어졌다.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복지제도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범죄의 원인을 악마적 속성을 가진 개인에게 돌리기보다는 사회적 요소에서 찾게 되었다. 사회과학이라는 학문 영역 전반이 마르크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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