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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애플 사파리 '나비 효과'··· 30년 웹 역사 속 결정적 장면

2019.03.19 Jason Snell  |  Macworld
최근 웹(web)이 30주년을 맞았다. 30년전 스위스 입자 물리학 연구소 CERN 소속의 팀 버너스리가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을 처음 제안했고, 이는 결국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웹으로 진화했다.



이 기간동안 애플 기기의 웹 브라우저 역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고, 필자는 이를 대부분 지켜봤다. 실제로 필자가 1996년 7월 쓴 첫 번째 잡지 표지 기사가 브라우저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애플이 웹 자체의 진화에 끼친 영향을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다. 지금부터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웹 초기
무엇보다 사상 첫 웹 브라우저가 애플의 제품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애플 로고를 달고 나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현재는 애플에 소유하고 있다. 팀 버너스리는 지난 1990년 넥스트(NeXT) 컴퓨터에서 실행되는 월드와이드웹(WorldWideWeb)이라고 이름 붙인 첫 브라우저를 만들었다. 바로 이 넥스트를 만든 것이 스티브 잡스다.

넥스트는 1997년 애플에 인수됐고, 넥스트스탭(NextStep) 운영 체제는 맥OS X과 iOS의 기반이 됐다. 현재 iOS 개발자 수천명이 NSText 등 'NS'로 시작하는 기반 프레임워크에서 작업하는데, 이 NS가 넥스트스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버너스리는 결국 자신의 브라우저 엔진을 크로스 플랫폼 언어로 재개발했다. 당시 넥스트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넥스트스텝의 옴니웹(OmniWeb) 브라우저

그 이후에 등장한 중요한 브라우저가 NCSA 모자익(Mosaic)이다. 필자가 실제로 사용해 본 첫 웹 브라우저다. 이 브라우저는 지금 보면 너무 시시해보일 수 있지만, 1993년에는 경이적인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인터넷 사용자는 극소수였고 기본적으로 단순한 텍스트였다. 고퍼(Gopher)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이퍼링크를 통해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기본적으로 플래인 텍스트와 화살표, 긴 옵션 메뉴로 구성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모자익은 달랐다. 필자가 UC 버클리에서 아파트 소파에 앉아 이 브라우저를 필자의 파워북 160에서 실행했을 때, 화면에 무려 '그림'이 나타났다. 당시 파워북 화면은 컬러를 지원하지 않아 흑백이었지만, 그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분명한 그림이었다. 더구나 밑줄 모양의 하이퍼링크가 달려 있어 이를 클릭하면 다른 페이지로 바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은 이후 불과 몇년 만에 인터넷의 표준 방식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원시적이지만, 웹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웹은 그 이전의 웹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됐다.

1차 브라우저 전쟁
NCSA 모자익 개발에 참여한 마크 앤드리샌은 베이 에어리어(Bay Area)에서 나와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Netscape Communications)을 공동 설립했다. 웹 브라우저를 상용화하기 위한 행보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전작의 후속 프로젝트로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만들어 공개했다. 일리노이 대학의 여러 소규모 팀 대신 고용된 전문 개발팀이 만든 이 브라우저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브라우저가 실제로 어떠 해야 하는지 원형을 보여줬다. 넷스케이프는 맥용 버전을  발표됐고 결국 클래식 맥OS에 번들로 들어가 맥의 기본 브라우저가 됐다.

맥용 넷스케이프 네비케이터 1.0N

그리고 마침내 1995년 지각변동의 날이 도래했다. 당시 윈도우 운영체제로 컴퓨터 산업을 지배하고 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웹을 지원(이라고 쓰고 지배라고 읽는다)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실제로 이듬해인 1996년에 인터넷 익스프로러 맥 버전이 공개됐다.

이것은 다소 이상한 전개였다. 애플의 최대 라이벌인 마이크로소프트가 (당시 애플은 살아남기 위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맥에서 쓰는 넷스케이프보다 더 좋은 브라우저를 만든 것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더 빠르면서도 넷스케이프에서 쓸 수 있는 모든 브라우저 플러그인을 충실하게 지원했다(이 때는 브라우저 플러그인이 골치거리가 아니라 유용한 것으로 간주됐다). 심지어 커스텀 폰트 같은 멋진 기능을 추가로 쓸 수 있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넷스케이프를 압도했다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애플 팬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맥용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매우 훌륭했다. 그리고 1997년 여름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간의 애플의 생존을 둘러싼 그 유명한 협상 이후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맥의 기본 브라우저가 됐다.

사파리와 웹킷의 등장
이제 시간은 2000년대 초로 넘어간다. 애플 제품은 1997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윈도우 PC보다 느리다는 것이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윈도우용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맥용 익스플로러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작동했다. 이런 상황을 스티브 잡스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대비 맥의 최대 약점이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브라우저라고 생각했다. 어떻게하면 마이크로소프트가 맥용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개선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가 바로 맥용 새 브라우저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그 자세한 과정은 켄 고신다의 책 '크리에이티브 셀렉션(Creative Selection)에 잘 나와 있다). 브라우저 속도를 가능한 빠르게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과가 웹킷(WebKit) 오픈소스 프로젝트와 사파리(Safari) 웹 브라우저였다. 2003년 처음 나온 후 맥의 기본 브라우저는 인터넷 익스플로러 대신 사파리가 됐다. 당시 사파리는 일종의 청량제였다.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경쟁에서 애플이 자신의 길을 개척할 것임을 선언한 신호탄이기도 했다.

애플 사파리오늘 날 사파리는 맥과 iOS의 브라우징 경험의 핵심이자, 애플의 중요한 자신이다. 그러나 웹킷 렌더링 엔진은 구글이 장악했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크롬(Chrome) 브라우저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나중에 구글은 웹킷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었고 크로미움(Chromium)이라는 다른 프로젝트로 분기했다.

그리고 웹의 역사를 오래 지켜본 사람들을 놀래킨 사건이 발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브라우저 엣지(Edge)를 크로미움 기반으로 개발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2000년대 초반 애플이 윈도우 PC 대비 맥 성능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했던 기술적 성과가 현재 주요 웹 브라우저 모두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웹 브라우저 개발이 크로미움으로 단순화되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90년대 맥 사용자가 이미 경고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맥 사용자는 "보고 싶은 웹사이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제대로 보이는 것만큼 나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크롬에서만 정상 작동하는 것'도 브라우저만 바뀌었을 뿐 기본적으로 같다. 

필자는 웹이 끊임없이 혁신의 끝에 향해 진화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30년 역사에서 배운 것을 잘 알고 있다. 즉, 역사의 모퉁이 뒤에는 또다른 놀라운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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