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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 형이상학에서 합의와 계약으로

2011.12.15 김민철   |  CIO KR
부뚜막 귀신, 동자 귀신, 혹은 관운장의 혼령을 섬기면 미신으로 치부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외치면서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고차원적인 종교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신교보다 유일신교가 종교적으로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일신교가 다신교 이후에 등장한다는 사실 또한 이를 방증하는 듯하다. 이는 사실일까?

그리스 신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신교에서는 숭배 대상의 특징이 매우 분명하다. 바다나 불 혹은 호랑이나 곰의 정령을 섬기는 부족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들의 숭배 이유는 분명하다. 활활 타올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이나 쓰나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마을 혹은 도시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는 바다의 힘은 너무나도 가공할 만한 것이다. 호랑이의 용맹도 곰의 힘도 경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추앙하는 관운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80근짜리 청룡도를 휘두르며 백만 대군을 무찌른 무술과 용기, 조조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엄청난 보물과 미인을 선사했음에도 그를 초개같이 버리고 유비를 찾아 떠난 신의와 절개, 어깨에 맞은 화살의 독의 치료하기 위해 생살을 째고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신음 소리 한 번 없이 참아낸 인내와 절제, 그리고 임종 시에 보여주었다는 기이한 사건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그의 정령이 얼마나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것인지를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유일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전지전능'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불이나 바다, 호랑이나 곰, 혹은 관운장의 혼령과 비교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구체적인 생생함을 상실한 채 애매하고 추상적인 느낌만을 줄 뿐이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블레이크는 유일신의 이러한 문제점을 비꼬아 그를 “Nobodaddy”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소설보다 만화, 철학적 이론보다는 옛날이야기로 이루어진 역사책이 더 재미있고 와 닿는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숭배의 대상이라는 측면에서도 당연히 구체적인 존재에 대해서 더욱 경외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 <해운대>에서 볼 수 있는 쓰나미나 <주온>에 나오는 귀신이 더 무서운가, 아니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더 무서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후자라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의 진행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일까? 필자가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아이들은 로봇태권브이가 더 센지 마징가 제트가 더 센지 논쟁을 벌이곤 했는데, 종교 간의 대결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유일신의 등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부족이 섬기는 신이 더 강함을 주장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전지전능한 유일신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좀 더 쉽게 설명해 보자.

불을 섬기는 부족과 바다를 섬기는 부족, 그리고 대지의 신을 섬기는 부족이 논쟁을 벌인다고 해 보자. 불을 섬기는 부족은 “우리 신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지. 물도 증발시켜버리고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자랑할 것이다. 바다의 신을 섬기는 부족은 “무슨 소리야? 우리 신이야말로 불도 꺼버리고, 모든 것을 쓸어갈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어”라고 주장할 것이고, 대지의 신을 섬기는 부족은 “흙은 불도 끄고 바다도 메울 수 있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네 꼬마들이 모여 자기네 형 자랑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태권도 2단에서 시작한 형 자랑이 몇 명을 거치면 “태권도 4단, 유도 5단, 우슈 3단, 검도 2단, 합기도 4단, 십팔기 3단......” 등등 해서 대충 무술 28단 정도에 권투, 레슬링 등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가 되어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형은 못하는 게 없어”가 돼야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종교 간의 논쟁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존재를 내세운다면 다른 종교와의 이론 투쟁에서 실패할 리 없게 된다. 유일신교는 다른 모든 종교를 꺾고 종교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하지만 형 자랑하는 아이들의 말싸움에서 태권도 4단짜리나 3년째 권투를 수련하는 형은 진짜 무서운데, 못하는 게 없는 형은 얼핏 듣건 잘 생각해 보건 그다지 무섭지 않다. 이는 구체적 숭배의 대상과 전지전능을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나마 헤라클레스의 울퉁불퉁한 근육과 가공할 힘,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 불의 신과 바다의 신이 보여줄 엄청난 분노와 대지의 신이 베풀어줄 풍요로움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 블레이크의 말처럼 그는 그저 ‘정체 모를 아버지(Nobodaddy)’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어떤 유명한 학자의 말처럼,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의 이행은 무신론으로의 발전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든 동화에서든 전설에서든 현실에서든 그 힘을 경험한 대상을 숭배하는 것은 쉽지만, 그냥 “울 아빠는 무지무지 세! 못하는 게 없어! 아무도 못 당해!”라는 말에 겁을 먹는 것은 철부지 어린 아이들뿐이다. 종교가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종교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측면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을 통해 모든 사람은 평등한 존재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원죄를 가진 신 앞의 죄인이라는 의미에서일 뿐이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이체로 상징되는 무신론의 등장으로 원죄의 굴레를 벗음으로써 모든 인간 개개인은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모든 것은 개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이것이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라는 실존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우주를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라는 형이상학적 본질에 삶의 의미와 목적이 종속되던 시대는 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재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결정된다. 구성원 개개인이 궁극적 권위를 가지는 그러한 사회에서 사회의 모든 운영 원리는 개개인의 합의와 계약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중세 사회의 운영 원리가 형이상학이었다면, 근대 사회의 지배 원리는 합의와 계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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