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canvas

인문학|교양

인문학 | 패러다임과 겸손함

2012.06.15 김민철  |  CIO KR
현대에 들어와 식자인 척 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만한 말이고, 많은 이들은 실제로 이 말을 사용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패러다임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쉽사리, 그리고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긴 정치, 도덕, 자유주의 등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주저 없이 자주 사용하는 말에 대해서조차 그 정확한 뜻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이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 폼 나는 말의 원조는 토마스 쿤이라는 과학자이다. 그는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기념비적인 저작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통해 과학의 발전을 설명하였는데, 그것이 일종의 유행어가 되어 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학자들까지도 차용해 쓰고 있는 것이다. 상당수가 실제로는 그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와 관련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면 나는 “패러다임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라고 묻곤 한다. 설사 동의어가 아닐지라도 특정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용어를 알고 있다면 그 말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책에서 ‘관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독자뿐 아니라 다수의 필자에게도 해당된다. 그 말의 뜻을 물어보면 오히려 묻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기지만, 정작 설명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입장’ 혹은 ‘생각’과 동의어 내지 유사어임을 말해주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비로소 그 말을 보다 정확히 이해한 것이다. 이해란 설명력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인기 인문학
->인문학 | 천리마론
-> 인문학 | 빼앗고자 하거든 먼저 주어라
-> 인문학 | 형이상학에서 합의와 계약으로
-> 인문학 | 진정한 자유 ; 얽매이지 않음
->인문학 | 옳고 그름이 아닌 멀고 가까움
---------------------------------------------------------------

그렇다면 패러다임은 어떤 다른 말로 대체 가능할까? 이론, 사고틀, 세계관, 가치관 등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첫째는 그런 보잘것없는 의미를 가진 말이 어떻게 그렇게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왜 그런 쉬운 말들을 놓아두고 어려운 말을 쓰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전단계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중견 사업가이자 노총각 동욱은 김태희 뺨치는 미인을 소개받았다. 그는 단번에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2주만에 프러포즈를 통해 결혼에 골인했다. 주변에서는 좀 더 신중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걱정 마. 예쁘면 뭐든지 다 용서되는 법이야.”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결혼 후 작은 문제가 생겼다. 그녀가 집안일을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고왔던 손이 망가져가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동욱은 가정부를 구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밝혀진 또 한 가지 문제는 그녀가 고가의 사치품 매니아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주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론 앞에서는 그녀의 주사마저 애교로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출이 잦아지고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결혼 전부터 만나던 친구들이라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점차 그들을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만났다 하면 노골적으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은 예사였고, 연락 없이 외박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뭔가 찜찜해지기 시작했지만, 지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최고의 여자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런데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목격담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외출과 외박이 잦은 이유는 많은 남성들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이었다. 그가 따져 묻자,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났다. 강짜를 부리고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다가 결국은 자해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그는 넌덜머리가 났다. 하지만 헤어지기를 요구하자, 그녀는 전 재산의 80%를 달라고 했다. 결혼 전 그녀와 헤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만에 하나 헤어질 경우에 그렇게 하기로 서약서를 써 준 것이 화근이었다. 동욱은 재판에서 패소하여 재산의 대부분을 잃은 채 암울한 시간을 보냈다.

몇 년 후 다시 재기에 성공한 동욱은 다시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어떤 여자를 소개해줄까 물으면 “얼굴 예쁜 여자는 싫어요. 얼굴값을 한다니까요. 착하고 이해심이 많아야 해요”라고 대답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해하기에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욱이는 좋은 여성에 관한 나름의 이론, 가치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반론을 제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 결혼 후 자신의 이론에 반하는 증거가 계속해서 발견되었을 때조차도 그는 자신의 이론을 고수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계속 발견되고 축적되어 가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제공되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리고 혼란기를 겪은 후에 전혀 새로운 이론을 채택하게 된다. 여기에서 여성관 혹은 여성에 관한 이론이나 가치관이 패러다임에 해당하며, 낡은 여성관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여성관을 채택한 사건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나름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살아간다. 갈릴레오 이전에는 지구가 아니라 하늘이 돈다고 믿었다. 과학이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입증된 이론이 아니라, 신의 뜻이나 형이상학적 목적인에 대한 탐구라고 믿었다.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이 정설이었고,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훌륭한 여성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내용에 반하는 증거가 나와도 무시되었다. 문제점이 쌓이고 쌓이다가 특정한 계기가 마련되면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을 겪게 된다. 그것이 바로 패러다임의 변화인 것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목적론에서 기계론으로,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위계적 인간관계에서 평등한 사회로의 전환은 모두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쿤은 객관적이고 점진적으로 보이는 과학의 발전, 나아가 사고의 발전이 실제로는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임을 역설한다. 우리는 모두 시공간에 얽매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편견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이론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 간에는 소통이나 대화가 불가능하다. 공자가 “도(道)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는 논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도 동일한 내용이다. 근본 원칙은 종교적인 것이며, 종교를 달리하는 사람들 간에는 대화로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독단적이고 절대적 사고가 판치고 그 폐해가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쿤은 우리에게 정말로 객관적이어 보이는 과학마저도 사회 구성원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고정관념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경험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지고,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한 발 물러서야 한다는 작은 진리를 보다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CIO Korea 뉴스레터 및 IT 트랜드 보고서 무료 구독하기
추천 테크라이브러리

회사명:한국IDG 제호: CIO Korea 주소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23, 4층 우)04512
등록번호 : 서울 아01641 등록발행일자 : 2011년 05월 27일

발행인 : 박형미 편집인 : 천신응 청소년보호책임자 : 한정규
사업자 등록번호 : 214-87-22467 Tel : 02-558-6950

Copyright © 2024 International Data Group. All rights reserved.